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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Sep 02. 2017

반증가능성이 있는 믿음

칼 세이건의 <콘택트>를 읽고

“제 생각은 이래요. 관료화된 종교들은 누미너스를 직접, 마치 6인치 망원경을 통해 관찰하듯 인식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미너스란 이런 것이다라고 머릿속에 집어넣어주려 해요.” 칼 세이건, <콘택트>     


내 생각도 그렇다.      


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진리를 드러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고 진화론은 사기라고 생각했다. 여호수아가 적을 더 많이 죽이고 싶어서 해와 달을 멈춰달라고 기도했을 때 실제로 우주의 운행이 24시간 동안 멈춘 적이 있다는 사실을 NASA에서 밝혀냈다는 거짓말도 믿었다. 극단주의, 근본주의 같은 세력은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스펙트럼의 한 쪽 끝에 쳐 박혀 있어야 할 근본주의가 이상하게도 한국 기독교에서는 주류라는 점이다. 나는 그저 작고 평범한 교회에 다녔던 것뿐인데도 정통 신학교에서조차 인정하지 않는 신앙관을 주입받았다.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칼 세이건의 소설 <콘택트>에서 주인공 엘리는 과학자다. 우주에서 외계 문명이 보내는 전파 메시지를 수신하고 해석하는 프로젝트의 책임자다. 소설 속에서 외계인의 메시지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종교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종교인들은 우주로부터 오는 메시지가 바로 신의 메시지라고 주장했다. 신앙심 없는 과학자들 따위가 독단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이다. 외계 메시지를 해석하는 일에 사상 초유로 미국과 소련이 화합하는(칼 세이건은 소련의 몰락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 마당에 정부는 종교계의 볼멘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정부는 엘리가 종교계 인사, 특히 미국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목사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불가지론자였던 엘리는 대담을 준비하기 위해,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인적 관심으로 백과사전에서 ‘성스러움’이라는 표제를 찾아 읽게 되고 거기서 ‘누미너스’라는 개념을 발견한다.     


엘리가 말하길 한 신학자에 따르면 누미너스는 ‘엄청난 신비’라고 한다. 그리고 엘리는 그게 바로 모든 과학도들이 갖고 있을 경이감이라고 확신에 차 말한다. “누미너스가 종교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그런 관료화된 종교를 따르는 사람과 혼자서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 중에서 과연 누가 더 종교적이겠어요?”     


나는 과학도가 아니다. 따라서 과학도가 느낄만한 ‘엄청난 신비’를 느낄 일은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응당 느껴야할 ‘엄청난 신비’도 나는 경험해보지 못 했다. 다른 신앙인들은 자신의 누미너스 경험을 자랑했다. 신을 만났다고,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신이 나의 길을 인도해주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런 경험이 없었다. 많은 설교와 간증이 누미너스를 이야기했지만 그건 그들의 경험일 뿐이었다. 어떤 이는 신앙에도 ‘6인치 망원경’ 같은 게 있어서 이를 통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성경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6인치 망원경’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소용없었다.      


하긴 종교에 그런 만능도구가 있을 리 없다. 성경을 읽는다고 누구나 다 신을 만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과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나 6인치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천체물리학을 저절로 알게 되는 건 아니다. 끊임없는 가정과 반증의 사유만이 과학적 누미너스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누구나 다 안다. 아무나 과학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일부 기독교인들은 잘 모른다. 아무나 신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늘 너무나 안타까워하면서 자신만의 누미너스를 다른 사람에게 들이민다. 자기에게는 기쁨이 넘쳤던 누미너스라도 다른 사람에게 갖다 댈 땐 날카로운 칼이 된다. 그 칼을 느껴보라며 늘 의심하는 나를 푹푹 찌르고 나서는 내게 죄가 많아서 혹은 간절함이 부족해서 기쁘지 않은 거라고 말하곤 했다. 오해하지 말길. 나는 ‘관료화’된 기독교를 두고 말하는 거니까.      


믿음은 회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의심의 과정 없이 믿는 것은 그냥 프로그래밍에 불과하다. 현대 종교, 특히 근본주의 기독교는 과학 덕에 많은 난관에 봉착해있다. 과학이 미지의 영역을 계속 개척해감에 따라 정작 그 미지를 대상으로 하는 믿음이 설 자리가 없는 듯해 보인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반응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과학을 부정하기 위한 용도의 유사 과학을 만들어냈다. 믿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믿음에 장애가 되는 요소를 모두 제거하고 나면 남는 건 무엇일까? 차라리 추천하는 건 뇌과학을 더 발전시켜서 종교적 의심을 관장하는 영역을 제거하는 시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럼 아무도 진화가 과학적 증거로 증명된 사실이라는 걸 상상하지도 못할 테니까.     


<콘택트>에서 엘리가 경험하는 누미너스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믿음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설사 신이 정말로 하늘 위에 살고 있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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