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에서 1년 6개월을 살면서 선거를 세 번 겪었다. Xefi Suku(우리로치면 '동장' 혹은 '면장') 선거, 대통령 선거, 총선이다. 동티모르에서 선거 혹은 투표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 않겠냐만은, 동티모르 자체가 투표에 의해 탄생한 나라라는 점을 생각하면 시골 마을 면장까지 주민이 직접 뽑는 번거로움을 자처하는 일이 이해가 간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정작 지방자치제는 실시하고 있지 않다. municipiu(도), postu administrativu(시 혹은 군), suku(면), 그리고 aldeia(행정구역 최소 단위)에 이르는 행정구역 단위에서 직선으로 장을 선출하는 단위는 오직 suku밖에 없다).
동티모르에서 투표는 대단히 번거로운 일이다.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태어난 고향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별도의 주민등록 시스템도 없고 거소지 신고도 없는 탓인지 유권자 명부는 오로지 출생지에서만 작성이 가능한 모양이다. 선거일이 되면 5톤 트럭에 사람들이 한 가득 타고는 자기 마을이 있는 산으로(보통 자기 고향이나 출신 시골을 가리켜 foho, 산이라고 부른다) 향한다. 아무 맥락 없이 이 장면을 본다면 분쟁 지역을 탈출하는 난민 행렬이 연상될 정도다.
정치적으로 아직은 어린, 그래서 늘 혼란이 잠재해 있는 이 나라에서 외국인으로서 선거를 지켜보는 일은 흥미로우면서도 걱정되는 일이기도 하다. 동티모르 사람들은 매우 '정당적'이다. 주민 대부분이 정치 정당에 적을 두고 있고 선거가 되면 대규모 캠페인이 마치 축제처럼 연달아 이어진다. 의회 의석 수는 65석인데 자그마치 열여섯 개의 크고 작은 정당이 있다. 거리를 다니다 보면 각 정당의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이나 집 대문에 걸려 있는 당 깃발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선 그만큼 정치가 생활과 밀접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정당이 무척 많은 탓에 갈등도 상당하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종종 동티모르 동향 관련 뉴스를 읽어보면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태는 아니라는 걸 쉬이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선거 결과에서 비롯할 가능성이 있는 소요 사태를 걱정하는 외국인들이 많다.
요새도 이런 이유로 정세적으로 꽤 불안한 편이다. 지난 6월에 총선이 있었다. 동티모르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어 총선 결과 제 1당인 FRETILIN이 정부를 구성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 정당이 과반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두번째로 많은 의석을 가진 정당과 단 1석 밖에 차이가 안난다. 압도적인 표 차이를 내지 못한 까닭에 연합 정부를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은 정부가 내각이 수립되어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긴 했지만 어렵게 구성한 연립 내각마저도 의회 의석 수가 과반이 안 되는 상황이다.
정세하가 불안하다는 말이 계속 나오다가 여야 갈등이 표면적으로 노출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연립 정부의 예산안을 야당이 거부한 일이다. 새로 출범한 정부가 최근에 2018년도 정부 예산 프로그램을 의회에 제출하였지만 의석 과반 이상을 점하고 있는 야당 연합이 이를 거부했다. 야당 연합이 예산안을 수용하지 않을 의사를 재차 밝히면서 조기총선, 즉 재선거 가능성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고 한다. 이럴 경우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내년 3월이나 되어야 총선을 치를 수 있고 그때까지는 예산안이 없는 상태로 나라 살림을 꾸려야 하는 게 동티모르 정부가 처한 현실이다(이경우 새로운 예산안이 편성될 때까지 2017년 예산안의 12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만 익년도 예산으로 집행할 수 있다고 한다).
다행히 이번 예산안 거부에서 비롯한 물리적 충돌이나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의회 의사당 앞에서 데모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과격한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진 않다. 그러나 결국 예산안이 편성되지 못해서 조기총선이 현실화된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큼직한 프로젝트들이 문제다. 개발도상국이어서 예산 집행이 중지되어봤자 얼마나 큰 차질이 있겠냐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오히려 개도국이기 때문에 집행해야 할 각종 원조 자금이 기다리고 있고 필수적인 인프라 투자가 한시바삐 실행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일종의 '정치 과잉'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주민의 궁핍한 삶을 개선하고 가난한 국가에서 탈출해야 하는 일이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정당간의 이해관계를 전면에 앞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이들의 갈등으로 인해 한동안 정부 기능이 마비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막대한 재선거 비용까지 지출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 과잉'이 문제라고 해서 아무런 민주적 논의 절차와 갈등 해결 과정 없이 정책을 밀어붙이는 게 능사는 아니다. 나라 돌아가는 꼴이 답답하여 군부가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군대를 동원해 국가 권력을 휘어 잡은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포기한 댓가로 경제 성장을 택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예외적으로 한 나라가 결국 경제 성장에 성공했다. 경제 성장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사회공동체는 몰라도 행정, 입법, 사법 국가권력이 일치단결하여 전진했다. 원하던 경제 성장을 얻었고 이제는 그 비용을 한꺼번에 치르고 있다. 이른바 '후불제 민주주의'론이다. 민주주의를 구매하는 데 있어서 선불이 저렴할지 후불이 더 효과적일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치루어야 할 값이 있다면 마땅히 내야 한다. 민주주의는 공짜가 아니다. 언제가 되었든 청구서는 반드시 날아온다. 최근 몇 년 간 한국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던 무수한 정치 갈등이 과거에 민주주의를 속성으로 익힌 데 대한 댓가라면 지금이라도 그에 마땅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 정부 예산안을 거부한 과반수 야당들은 정부의 예산한이 위헌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고심해서 예산을 짰을 것이다. 이 두 세력 사이의 논쟁 국면에서 각 정당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혹은 예산안을 두고 자기 정당의 이해만을 대변하려는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야당은 야당 나름대로 손쉬운 해결책(을 사용하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조금 더뎌 보여도 부디 한 걸음씩 차분히 내딛어 가길 바랄 뿐이다. 민주주의를 제때에 제값으로 구입할 기회를 지닌 동티모르를 응원한다.
* 아래 기사에서 관련 상황을 잘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