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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Nov 13. 2017

"빨래를 해야겠어요"

빨래를 해야겠어요
오후엔 비가 올까요
그래도 상관은 없어요 괜찮아요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아요
그러면 나을까 싶어요
잠시라도 모두
잊을 수 있을지 몰라요
(이적 - 빨래)

정말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나날의 연속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빨래를 한다. 빨래 중에서도 고난도에 속하는 이불 빨래를 한다. 물론 옷도 빤다. 매일. 삶아서. 


이적은 헤어진 연인을 잊기 위해 빨래를 하지만 나는 순수한 목적으로 빨래를 한다. 세탁물을 깨끗이 하기 위한 빨래. 이불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빈대 혹은 옴 진드기를 없애기 위한 빨래. 


지난 8개월 전 왼쪽 발목 부근에 네다섯 방의 무언가에 물린 자국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그게 미친듯이 가렵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 나는 그게 개미에 물린 것이라 생각했다. 모기 물린 자국보다는 크고 단단한 봉우리가 그래보였다. 개미는 한번에 여러 방을 문다. 특히 사람의 옷과 피부 사이에 들어와 옷이 개미를 짓누르면 자기를 해치려는 줄 알고 여러 방을 물어댄다. 그 가려움은 몇 주 정도 지속된다.


5개월 전, 이번에는 양 다리에 수십 방의 물린 자국이 나타났다. 형태는 전과 비슷했지만 수가 엄청났다. 우리 집에 개미가 그렇게 우글거리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원인 규명이 새로이 시작되었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것은 빈대일 것이다. 모든 정황이 빈대가 범인임을 가리켰다. 즉시 조치에 들어갔다. 모든 이불과 옷을 뜨거운 물로 빨았다. 문제는 세탁기가 참으로 시원찮다는 점이다. 세탁통과 탈수통이 따로 되어 있고 급수를 수동으로 해야 해서 매번 바가지로 물을 퍼다가 넣어주어야 했다. 이후로도 산발적으로 몇 방 물리기는 했으나 그래도 차차 나아갔다. 


2개월 전, 다시 시작되었다. 무서운 빈대가 다시 내 살을 물어댔다. 다시금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했다. 매트리스에 살충제를 뿌려대고 알콜을 부어대고 티트리 오일을 바르고 등등. 지난번 물린 자국이 채 아물기도 전이었다. 안 긁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긁을 수밖에 없어 아주 조금 긁기만 해도 상처가 생기고 피가 나온다. 나는 조금 긁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차려 보니 5분 넘게 긁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빈대 박멸을 포기한 어느날, 동네 가게에서 안면이 있던 미국인 의사 모니카 선생님을 만났다. 그녀에게 그냥 지나가는 말로 빈대(베드버그)에 물려서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내 피부를 보더니 이건 빈대가 아니랬다. 옴 진드기란다. 경력 8개월 차 베드버거를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조건 옴이라고 했다. 퍼메트린이라는 약을 사서 바르라고 했다. 이 약을 자기 전에 바르되 바르곤 난 다음 12시간이 지난 후에 깨끗이 씻어내야 한단다. 집에 가서 옴 진드기에 대해 찾아봤다. 옴 진드기가 사람 피부 밑에 알을 낳아 알레르기성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란다. 범인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었다. 내 몸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약을 발랐다. 며칠간은 계속 가려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약을 발랐는데도 새로운 자국이 일주일 동안 계속 나타났다는 거다. 그럴 땐 한번 더! 한번 더 발랐다. 한번 더 발랐는데도 새로운 자국이 일주일 동안 계속 나타났다. 그러자 모니카 선생님은 속옷과 양말을 삶고 이불을 매일매일 갈아주라고 했다. 그리고 이버멕틴이라는 먹는 약을 먹어보라고 했다. 먹었다. 속옷과 양말을 삶고 이불을 매일매일 갈기 시작했다. 여전히 새로운 자국이 나타났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을 놓은 채 긁어댔다. 


나는 왜 빈대에서 옴이라고 확신했던 걸까. 아마 빈대라고 생각하고 실행했던 조치가 모두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옴은 빈대와 달리 약을 바르면 박멸된다.그래서 나는 옴으로 갈아탄 것이다. 그런데 바르는 약, 먹는 약 둘 다 아무 소용이 없다. 김연우가 부릅니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모니카 선생님의 말로는 약을 발라서 몸에 있는 옴 진드기를 모두 박멸해도 이불이나 옷가지에 남아 있는 유충에 의해 언제든지 다시 옮을 수 있다고 했다. 옴에는 면역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옴에 걸린 아이들과 악수를 하면 또 다시 옮아올 수 있다고 했다. 아, 동티모르는 학생과 교사가 악수를 하는 인사 문화가 있다. 심지어 악수한 손을 학생이 자신의 입에 갖다대어 키스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학교 선생님 중에서는 나만 이런다는 거다. 옴 진드기가 8개월 동안 서너 차례나 옮을 정도로 전염력이 강한 증상인지 모르겠다. 그것도 나에게만 이런 증상이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나는, 다시 한번,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


결국 내가 하는 일은 다시 빨래밖에 없다. 빈대든 옴이든 진드기든 매일 빠는 수밖에 없다. 물론 빨래를 해도 계속 물어대지만 그래도 빨래를 하지는 않을 수 없다. 사실 고백하자면 내가 하는 빨래 역시 순수한 목적의 빨래는 아니다. 내가 매일 물을 끓여가며 빨래를 하는 이유는 오로지 가려움을 잊기 위해서다. 오후에 비가 와도 상관없다.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면 나을까 싶다. 잠시라도 모두 잊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또 한 명의 시지푸스다. 이불을 빤다. 넌다. 말린다. 눈을 돌리면 어제 쓴 이불이 있다. 빤다. 넌다. 말린다. 눈을 돌리면 오늘 쓴 이불이 있다. 빤다... 눈물이 난다...


.

.

.


빨래를 하면서 가려움은 잊었지만 나는 긁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다시 이적의 노래다.  


그게 참 마음처럼
쉽지가 않아서
그게 참 말처럼
되지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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