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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May 10. 2019

'알아서 잘' 읽기

어슐러 르 귄의 에세이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를 읽으며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어 기록해둔다. 이 글 대부분이 작가에 관한 사전 정보가 없이 잘 읽히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아래 부분은 특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여러 번 읽어보았다.


사랑, 희망, 꿈 등의 영감을 주는 단어를 새겨놓은 돌을 살 때가 있다. 그 중에는 신념이라고 새겨놓은 돌도 있다. 그걸 보면 나는 어리둥절하다. 신념이 미덕에 속하던가? 그건 그 자체로 가치 있지 않은가? 뭔가를 믿기만 하면 무얼 믿는지는 상관없지 않나? 만약 내가 화요일마다 말이 아티초크로 변한다고 믿는다면 그럴리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보다 나은가? (어슐러 르 귄,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p205)


우선 작가는 신념이라고 새겨놓은 돌을 보고 어리둥절해 한다. 신념이 미덕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때문이다("신념이 미덕에 속하던가?"). 그렇다면 저자는 신념 그 자체를 '가치'있게 여기지 않는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곧바로 "그건 그 자체로 가치 있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A하지 않은가?"라는 수사법은 A라고 생각할 때 쓴다. 


좋다. 살짝 헷갈리지만 대가의 글이니 읽다보면 이 모순을 해결해주겠지, 하며 더 읽어나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또 이 모양이다. "뭔가를 믿기만 하면 무얼 믿는지는 상관없지 않나?" 앞뒤 떼어놓고 이 문장만 보면 뭔가를 믿기만 하면 무얼 믿는지는 상관없다는 태도다. 즉 신념 그 자체가 가치있다는 태도다. 작가는 다시 한 번 신념 그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는 말이 아티초크로 변한다고 믿는 사람과 그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을 비교한다. 과연 믿는 사람이 의심하는 사람보다 낫냐고 묻고 있다. 즉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 자체가 미덕이 될 수 없다는 작가의 생각은 저 멀리 뛰쳐나갔다가 이 마지막 문장에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인터넷에서 원문을 살펴보니 과연 번역 문제였다. "그건 그 자체로 가치 있지 않은가?"의 원문은 "Is it desirable in itself?"다. '않은가?'는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도통 모르겠다.


아니, 사실 이건 번역의 문제가 아니다. 굳이 원서와 대조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저 이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예민하게 살피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분을 한 번 발견하게 되면 독자는 늪에 빠진다. 이제부터는 번역자와 편집자를 의심하면서 읽어야 한다. 해당 본문이 있는 장 서두에서 신념으로 번역된 belief라는 단어가 장 마지막 부분에서 슬그머니 믿음으로 바뀌어 번역된 것은 덤이다. 독자가 '알아서 잘' 읽어야 하니 독서가 피곤해진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며 어슐러 르 귄의 소설에 관심이 생겼다. 읽고 싶은 책이 늘어나는 건 읽은 책이 많아지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다. 예민하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었어도, 어찌되었든 책이란 읽고 볼 일이다. 조금 피곤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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