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의 책읽기
1. 박연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달
2. 앤절라 사이니, <열등한 성>, 현암사
3.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4. 주제 사라마구, <카인>, 해냄
2월에는 네 권의 책을 읽었다. 그중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은 몇 번이고 리뷰를 적으려다 첫 줄만 쓰고는 끝내 다 쓰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리뷰를 채 끝내지 못할 정도로 인상이 깊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읽은 책 중 그나마 리뷰를 쓰려고 시도한 책이라는 사실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의 몇몇 작품들은 내게 길고 자세하면서도 정확하게 쓴 일기와 같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정확하다는 데 장류진 소설의 특징이 있다. 가독성이 좋다는 평은 그래서 나오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장류진의 작품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기억보다는 인상에 남지 않았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월급을 포인트로 받았다는 에피소드는 기억나지만, 이 에피소드가 내게 어떤 느낌을 남겼는지는 불명확하다. 그래서 더 많이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느낌은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내 문제일 가능성이 크니까.
한편 다른 세 책은 서로 다른 의미로 내 마음에 강렬히 남았다. 박연준의 책은 우선 제목부터 날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은 이상하게 흐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선언 -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 은 더욱 생경하면서도 인상 깊다. 나는 박연준이라는 시인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시도 읽어본 적이 없다. 다만 그의 남편과 호주에서 머물며 함께 쓴 에세이집을 읽은 적이 있을 뿐이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이번 책을 읽으며 작가의 궁상떨지 않는 태도가 무척 좋았다. 시인이여, 불행하려면 얼마든지 불행하다 말할 수 있는 직업이여, 아무도 그 궁상에 토 달지 않는 직업이여! 그럼에도 작가는 따뜻하고 다정하다. 호연지기는 극기훈련 가서 기를 게 아니라 이런 책을 읽으며 배워야 한다.
<열등한 성>은 꽤 치열하게 읽었다. 과연 여자와 남자는 태생적으로 다른가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과 대답이 있을 수 있는데, 사실 이 책이 어떤 답을 제시해주진 않는다. 물론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자신이 이 분야를 전공한 과학자는 아니다. 다만 과학칼럼니스트로서 깊이 있는 문헌조사와 인터뷰로 나름의 논지를 펼친다. 사실 답은 명백하다. 과학이 무슨 말을 하든 여성과 남성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 침팬지의 수컷 중심 사회를 예로 들며 수컷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일군의 과학자들이 있다. 한편 다른 과학자들은 보노보를 가리켜 암컷이 지배하는 사회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 두 종과는 달리 지역마다 사회마다 세대마다 각기 다른 문화를 만들어낸다. 이는 사회문화적 맥락이 진화적 타고남보다 훨씬 강하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남성 중심의 과학자 집단은 과학을 통해 남성이 우월하다는 인식을 심는 데 일조했다. <열등한 성>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한편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은 성차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분명한 것은 그 어떤 진화적 타고남도 혐오와 차별의 근거가 될 순 없다는 점이다.
<카인> 읽기는 여러 모로 즐거웠다. 나 자신이 배교한 자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밑도 끝도 없는 '여호와 혐오'는 어디서 왔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닌 게 이럴 때 큰 도움이 된다. 성경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아직 열렬한 그리스도인일 때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다는 것을 알고(나는 니체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 정작 실제로 그가 어떻게 썼거나 말했는지 알지 못한다) 신성모독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복음>과 <카인>을 읽으면 니체의 선언은 그저 우습게 보이기까지 한다.
간단히 말해, 아브라함은 여호와만큼이나 대단한 개자식일 뿐 아니라 갈라진 혀로 누구라도 속일 준비가 되어 있는 유능한 거짓말쟁이였는데, 이 경우 이것은 이 이야기의 서술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사전에 따르면 불충하다, 거짓되다, 의리 없다 등등과 기타 비슷하게 훌륭하기 짝이 없는 자질을 의미한다. (p.95)
노아, 노아, 너는 왜 나오지 않느냐. 방주의 어두운 안쪽에 있던 카인이 큰 문의 문턱에 나타났다. 노아와 그 가족은 어디 있느냐, 여호와가 물었다. 모두 죽었습니다, 카인이 대답했다. 죽어, 그게 무슨 소리냐 죽다니, 어떻게. 음, 자신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익사한 노아를 빼면 모두 내가 죽였습니다. 이 살인자, 네가 감히 네 목숨을 살려준 데 대한 보답이냐, (중략) 이제 나를 죽여도 좋습니다. 아니, 나는 죽이지 못해, 하나님의 말은 물릴 수 없다. (p.207)
나는 그저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기독교의 신을 이토록 증오하고 경멸하게 만들었는지. 주제 사라마구가 여호와와 불화하게 된 사연을 소설로 써도 그의 다른 작품만 한 명작이 나오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