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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k Mar 30. 2020

움직임과 고요, 여행과 글쓰기

세스 노터봄, <유목민 호텔>

세스 노터봄의 <유목민 호텔>을 읽었다. 예전에 <이스파한에서의 하룻저녁>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여행 에세이다. 오래 전에 이미 절판되어 중고로 구해서 읽었었는데, 이번에 나온 <유목민 호텔>은 아마 원서 자체를 새롭게 출판했고 그걸 새로 번역한 듯싶다.


사실 예전 번역판으로 보았을 때는 무척 읽기 어려웠다. 나는 그게 번역 문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작가 이름부터 '노오떠봄'으로, 아주 예스럽게 표기했다. 이번에 같은 글을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니, 번역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과 생각 사이를 거니는 노터봄 특유의 문체 때문이었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을 띄엄띄엄 읽어가며 겨우 책을 마치고 난 다음 여전히 난해한 문장들을 되새김질하며, 여행과 글쓰기, 여행하며 글쓰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소설가인 노터봄은 마치 여행 역시 자기 직업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노터봄에게 두 가지 일은 각각의 시간과 공간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마치 원래부터 하나의 일인 양 일어난다. 쓰기 위해 떠나고 머물기 위해 쓰는 것이다.


예전에, 내가 지금 아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을 대 나는 움직임을 선택했고, 시간이 흘러 이해하는 것이 더 많아졌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움직임 안에서도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고요를 찾을 수 있음을, 그리고 움직임과 고요는 상반되는 것들의 조합 안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p.21)


각 에세이는 대체로 하나의 도시 또는 나라를 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장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나는 솔직히 노터봄이 뮌헨과 만토바와 취리히에서 뭘 했는지 도통 모르겠다('뮌헨에서의 사색', '그들은 그녀의 유골 위에 만토바를 세웠다', '취리히'). 반면 어떤 에세이들은 비교적 줄거리도 있고 심지어 재미있다('라이트 부인과 자바라경: 감비아강 보트 여행', '달 표면 같은 말리'). 공교롭게도 유럽 지역에서 쓴 글들은 대체로 사변적인 데 비해 소위 개발도상국이라 불리는 곳의 글들은 실제 일화들도 섞여 있어 더 읽을만하다. 아무래도 그런 곳에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곤란과 곤경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노터봄 특유의 '사변'은 사라지지 않는다. 곤란과 곤경은 무심히 지나가고 그 다음에야 우리는 그 곳을 유심히 바라본다.


가끔 여행을 다녀온 후 블로그에 글을 쓸 때 나의 여행을 자세히 소개하고픈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그 유혹에 넘어가 세세히 나의 행적을 기록하고 나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글이 되고 만다. 덩달아 내 여행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것 같아 여행에 관해 쓰기를 포기하기에 이르는데, 그러면 정말로 아무것도 안 남는다. <유목민 호텔>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있는 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책을 드물게 발견하거나 알게 될 때마다 꼭 찾아 읽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 피터 매티슨의  <신의 산으로 떠난 여행>,  폴 서루의 <여행자의 책> 같은 책들은 점점 찾기 어렵다. 서점에 넘쳐나는 세계일주 책들은 여행 그 자체를 바로 보여주려고 한다. 아마 사람들이 '읽기'보다는 '여행'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읽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유목민 호텔>이 더 필요하다. 쓸모없고 지루하고 재미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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