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ok Oct 06. 2016

'섬세한 문학 읽기'

테리 이글턴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은 읽고

수년 전쯤 어느 블로그에서 ‘소설무용론’을 제기한 글을 봤다. 그 블로거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소설을 읽는 일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 소설은 지식을 제공하지도 않고 재미와 감동도 영화보다 덜 하다. 따라서 지식을 쌓으려면 문학이 아닌 논픽션 등을 읽는 게 나으며 재미와 감동을 얻으려면 차라리 영화를 보는 게 나으니 소설을 읽는 일은 전적으로 시간낭비라는 것이다. 이에 당연히 소설옹호론자들의 불같은 댓글이 달렸고 블로그 주인장 역시 거기에 지지 않고 반박, 재반박 댓글을 달았다. 흥미로웠던 건 대다수 비판 댓글이 ‘당신은 책을 아예 읽지도 않으면서 괜히 소설만 까고 있다’는 식의 내용이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다른 글을 보면 정말 소설을 제외한 수많은 분야의 책을 탐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주장대로 재미와 감동을 얻기 위해 영화도 많이 보는 듯했다. 그는 책과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지만 소설만큼은 쓸데없는 장르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 블로그를 찾을 수 없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사실 내가 소설을 읽기 시작하게 된 건 그 글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위 블로거와 똑같은 이유로 소설을 읽지 않았다. 소설을 읽는 일(더 넓게는 문학을 읽는 일)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서는 막연하기만 했던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를 누군가 나름의 근거로 정리한 글을 두 눈으로 직접 읽고 나니 너무 편협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이 대체 뭘 잘못했다고 그걸 읽지 않는 이유를 조목조목 정리해서 포스팅할 수밖에 없었을까, 소설은 정말 유죄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나는 당연히 소설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판결할 수 없었다. 읽어보질 않았으니. 그래서 먼 훗날 만약, 아주 만약에 내가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된다면 소설도 꼭 읽어봐야지, 하는 결심을 했다. 물론 독서 자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그 결심으로부터 몇 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것은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면서였다. 월급을 받았는데 쓸 데가 없었다. 대출 이자와 원금을 얼마간 갚고 나면 돈이 아주 조금 남았다. 돈이 남는다는 건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좀 말이 안 되는 생각이긴 한데, 대출을 받아서 매달 원리금을 갚는 삶을 살면서 저축을 또 따로 하는 건 좀 사치라고 생각했다. 갚아야 할 원리금 외의 돈은 모두 써버려야 빚 있는 서민으로서의 쪼들리는 삶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런저런 이유로 돈이 남으니 남는 돈을 써야 했고 그 돈으로 무얼 할까 하다가 책을 샀다. 옷이나 자동차 같은 것보다는 책을 사고 싶었다. 빚 있는 서민으로서 적지 않는 돈을 들여 책을 샀으니 산 책을 안 읽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소설만 읽은 건 아니고, 처음엔 철학책이나 사회비평, 정치비평 같은 책을 읽었다. 그러다 소싯적 결심이 생각나 소설을 몇 권 읽기 시작했다. 


그때 읽었던 소설들은 지금 읽으라고 하면 읽을 수도 없는 것들이다. 혹자는 뭔가 있어 보이려고 그런 걸 읽었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는 있어 보이는 게 뭔지도 모를 때였다. 어느 철학책에서 보르헤스의 소설이 자주 언급돼서 보르헤스 전집을 읽어보기도 했고, 어느 서평집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참 재미있어 보이게 다루어서 그걸 읽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소설을 긍정하게 만든 단 한 권의 작품이 있다면 그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다. 아직도 이 책 제목을 보면 무언가가 심장을 쿵 내려치는듯한 느낌이 든다. 실은 저 책을 세 번을 읽었어도 아직 ‘자기 앞의 생’이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하고 자기가 10살인 줄아는 14살짜리 소년 모모가 자신의 아빠가 자신의 엄마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무엇을 느꼈을지도, 자신을 거둬 키워주던 로자 아줌마가 죽은 뒤 그 시체를 3주 동안이나 지켜낸 모모의 심정도 알지 못한다. 다만 무언가가 심장을 쿵 내려치는 듯한 그 느낌이 정말로 생생했다. 그게 소설의 맛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전 테리 이글턴의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이라는 책을 읽었다. 문학비평 입문서라고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섬세한 문학 읽기를 위하여’ 이 책을 써냈다고 밝혔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문학을 읽기 위한 도구를 제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언어 자체를 분석하는 것을 비롯해 서사, 인물, 해석, 가치 등의 관점에서 작품을 읽어보기를 제안한다. 당연히 테리 이글턴은 ‘심장이 쿵 내려치는 듯한 느낌’ 따위로 작품 분석을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제안한 대로 그의 분석은 섬세하다. 작품의 첫 문장만으로 어조와 화자의 태도 등을 분석하는 실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의 문학 읽기가 기교에 치우친 공허한 비평이론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론과 분석에 함몰된 나머지 작품이 지닌 감정과 감동을 외면하는 그런 비평을 가르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내가 파악한바, 테리 이글턴이 제시하는 비평적 읽기의 목적은 가치 있는 작품을 골라내어 작품의 가치가 주는 감동을 남김없이, 모조리 읽어내는 데 있다. 그걸 나처럼 무식하게 표현하면 ‘무언가가 심장을 쿵 내려치는 듯한 느낌’인 거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를 위해선 문학을 섬세하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책 덕분에 다시금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요새도 소설을 읽고 있다. 얼마 전에는 <자칼의 날>이라는 첩보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섬세하게 읽었던가? 아니다. 대강 읽었다. 이야기 자체는 무척 재미있었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성격과 시대적 배경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읽은 탓에 세부 묘사 대부분은 수박 겉핥기가 되었다. 줄거리는 소설의 주요 요소가 될지 모르지만, 소설을 읽는 단 하나의 목적은 아니다. 그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비평이론서 한 권 읽었다고 섬세한 문학 읽기가 금방 가능해지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익숙한 데서부터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실은 한국문학을 좀처럼 읽지 않았다. 이른바 세계문학 전집을 위주로 소설을 읽은 탓이다. 고전이 주는 보편적 가치와 감동도 있을 테지만 한편으론 나와 동떨어진 세상의 이야기를 온전히 수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문학 읽기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어로 한국인이 겪고 느끼는 감정과 상황을 그리는 문학을 읽어가며 섬세한 문학 읽기를 연습해야겠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비평을 내놓을 일은 없다. 그저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 풍부한 의미를 쉽게 놓친 나 자신의 독서 습관이 아쉽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려 한다. 테리 이글턴의 조언을 안내서로 챙겨 들고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처음부터, 신앙이 물음표로 머물러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