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솔 장편소설 『행간을 걷다』 리뷰
사이라는 세계의 지은이
— 김솔 장편소설 『행간을 걷다』 리뷰
“오른쪽 절반뿐인 너와 왼쪽 절반뿐인 나는 조깅하는 자들을 피해 하천변의 높은 쪽 길로 함께 걸었다. 어느 날 네가 담쟁이 가시에 팔을 긁혀 피를 흘리는데도 나는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김솔, 『행간을 걷다』, 현대문학, 2024, 49쪽)
장편소설 『행간을 걷다』의 주인공은 뇌졸중으로 몸의 오른쪽에 마비 증상이 온 인물이다. 하나였던 신체가 좌우로 갈라진 사태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소설가 김솔은 ‘이쪽과 저쪽으로 분리되어 버림’을 작품의 첫 문장(“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 나는 둘로 나뉘었다.”)에 곧바로 제시한다. 그러고는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그 틈새 안의 세계에 대하여 쓴다. 나뉘고 나서야 비로소 현현한 그곳을 주인공은 걷는다. 혹은 이따금 멈춰 그곳의 풍경을 가만히 응시한다.
인용한 문장의 “오른쪽 절반뿐인 너”라든지 “어느 날 새벽 몽마(夢魔)처럼 뇌졸중이 찾아와 나에게서 네가 떨어져나간 뒤부터”(103쪽)라는 표현처럼, 주인공은 자신이 잃은 정상 신체의 반쪽에게 ‘너’와 ‘네가’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한다. 건강한 ‘나’였다가 병약한 ‘나와 너’로 찢어진 한 사람의 존재가 꼭 샴쌍둥이 같기도 하다. 주인공이 반복적으로 ‘너’를 찾을 때마다, 희한하게도 왼쪽의 나와 오른쪽의 너가 계속 멀어지는 듯한 ‘거리감’이 독자의 정서를 가득 메운다. ‘사이’라는 세계가 확장되는 것이다. 한때 한몸이었던 제 반신을, 저렇게 남 대하듯 부르며 남은 생을 살아가겠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른쪽의 몸은 점점 굳어 갈 것이고, 왼쪽의 몸도 서서히 노쇠해질 텐데. 저 둘은 계속 벌어지다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다시 한몸이 되겠구나.
『행간을 걷다』는 기승전결을 좇아 훌훌 다음 장을 넘기는 소설이라기보다, 주인공이 보고 듣고 느끼는 바를 독자도 간접 체험하듯 감각해 보면서 느리게 읽어야 할 시적 산문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무엇무엇이다, 라고 요약 정리를 하는 것이 쉽지도 않거니와 그러한 시도가 썩 적절하다 여겨지지도 않는다. 어렵다면 어렵다고도 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무성의한 말로 이 작품을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행간을 걷다』를 읽다 문득 생각난 시를 빌려 와 본다.
“달리는 창으로 내다보니 / 흙길 하나가 구불거리며 산언덕으로 올라가고 있다 / 숲 사이로 올라가는 좁은 산길이다 / 전동차의 속도는 즉시 그 길을 지우고 / 터널의 어둠으로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을 친다.”
(김기택 시 「기찻길 옆 산길」 일부, 『갈라진다 갈라진다』, 문학과지성사, 2012, 98쪽)
소설 속 주인공이 두 쪽으로 갈라지기 전, 그러니까 한몸으로 건강히(빠르게) 다니던(行) 삶에 아무런 사이(間)도 벌어지지 않았던 시기가 저 시와 같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숲 사이로 올라가는 좁은 산길”, 한마디로 ‘사잇길’이 분명 창밖에 존재했음에도 “속도”로써 “즉시 그 길을 지우고”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을 친” 채로 달리던 기차와도 같은 삶. 행간을 미처 읽기도 전에 눈앞의 글줄을 닥치는 대로 섭렵하며, 그것을 삶의 정수이자 진리로 철석같이 믿으며 앞으로만 나아가던 욕망 어린 삶.
자신을 떠나 다른 남자와 새 삶을 시작한 아내를 보고도 주인공—반쪽의 나와 너, 즉 ‘우리’는 태연하다. “우리는 더이상 아내의 뒷모습을 쫓지 않았다. 아내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 남자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와 우리의 운명은 모든 남자들과 그들의 운명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155쪽)이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오로지 그 사잇길로만 걸어야 하는 주인공에겐, 아내 곁에서 ‘남편’ 또는 ‘남자’가 될 수 있는 양자택일의 가능성이 부재한다. 아내가 떠나지 못하게 붙잡는 삶은 ‘행간’이 아니며, 시인이 이른 “터널의 어둠”이 될 것임을 주인공도 독자도 이미 잘 알고 있다.
마지막 장을 덮고도 내가 다 읽은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독자의 뇌리에서 『행간을 걷다』는 쉽사리 ‘행간을 걸었다’라는 완료 시제가 되어 주지 않는다. 하기야 ‘다 읽었다’는 관념은 ‘아직 읽지 않았다’와 양극을 이루므로 행간-사이라 볼 수 없다. 『행간을 걷다』는 본문의 표현대로 “입구와 출구가 모두 없는”(14쪽) 상태로만 존재함이 온당하다. 좌와 우, 시와 비, 호와 불호, 청결과 불결, 도덕과 부도덕, 합법과 불법 등 세상의 수많은 양자적 가치에 ‘행간’이라는 힘든 길을 낸 소설가. 그 ‘사이’라는 세계의 지은이만큼은 독자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할 수 있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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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재훈(작가, 디자인 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