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리 잡설

[평일의 의식의 흐름. 여름] #2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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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생인 나는 ⟨아기 공룡 둘리⟩(이하 둘리)를 보며 자랐다. 동시대 또래들처럼 나 또한 ⟨둘리⟩를 텔레비전과 만화책으로 접했다. 주인공 둘리는 얼음과 함께 등장한다. 서울 한강에 대뜸 나타난 신비로운 거대 빙산에 웬 새끼 공룡이 냉동 상태로 잠들어 있었고, 점차 얼음산이 녹으면서 미지의 초록 생명체는 도봉구 쌍문동 어느 개천가까지 떠내려온다. 그리고 평범한 어린이 철수와 영희 남매—고길동 아저씨의 자녀에게 발견된다. 둘리 어드벤처 비긴즈.

대학 다닐 때 배우기로, 북유럽 신화에서 얼음과 안개로 이루어진 세계 니플헤임(Niflheim)은 우주의 근본, 생명의 탄생, 만물의 질서를 상징한다고 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웅들 가운데 가장 품행이 단정하고, 학교 선생님이었다면 도덕이나 윤리 과목을 맡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고지식한 데다 때때로 갈등 국면의 중재자 역할로도 나서는, 게다가 ⟨어벤져스⟩ 시리즈의 초능력자들 중 드물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며 편안히 늙어간 ‘캡틴 아메리카’는 둘리처럼 오랜 시간 빙하 아래 잠들어 있다 깨어난 캐릭터다. 둘리가 캡틴 아메리카처럼 바른 생활맨이라거나 타의 모범이 된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으나(고길동 아저씨의 집을 박살 내고 은행 건물을 통째로 훔친 만행을 떠올린다면⋯), 어쨌든 자기 나름대로는 생명 존중과 박애주의를 실천한다. 또치와 도우넛 같은 괴생명체(?)들을 고길동 아저씨의 집에 들이고 계속 지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매개자 역할을 하니 말이다. 물론 그 과정이 상당히 소란스럽기는 하지만. 둘리와 캡틴 아메리카가 북유럽 신화를 참고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두 캐릭터를 좋아하는 내가 어거지로 매칭을 시켜 본 거다.

내 머릿속에 ⟨둘리⟩는 ‘여름 만화’로 저장되어 있다. 둘리의 태생부터가 ‘얼음’이고, 그래서인지 겨울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1996년엔가 개봉한 극장판 제목도 ⟨아기 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둘리⟩ 하면 여름을 먼저 떠올리게 된 걸까. 추측을 해 보자면, 아마도 여름방학 때 ⟨둘리⟩ 만화책을 제일 집중적으로 섭렵했기 때문이 아니려나. TV 시리즈는 아무래도 밀린 숙제도 있고, 집 밖에서 애들이랑 놀기 바빠서 꼬박꼬박 챙겨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검색을 해 보니 1983년작인 원작 만화의 성공에 힘입어 KBS가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고 한다. 1987년에 1기, 1988년에 2기가 나왔고, 이후 1990년대에 여러 번 재방송되었다. 내가 드문드문 시청했던 ⟨둘리⟩는 사실 ‘본방’은 아니었던 셈. 아무튼 내 경우는 대여점에서 빌린 ⟨둘리⟩ 만화책을 쌓아 놓고 여름방학을 신나게 보냈던 관계로 ‘⟨둘리⟩ = 여름’이라는 공식을 멋대로 세워 버렸던 것이다. 나의 현 거주지에서 가까운 우이천 산책로는 도봉, 강북, 성북⋅노원으로 이어지는데, 계속 걷다 보면 쌍문동 권역에서 ‘둘리 벽화 거리’를 지나게 된다. 표면이 바래긴 했지만 색감과 이미지가 확실히 ‘겨울’을 표현하고 있다. 그걸 보면서도 내 정서는 계속 ‘여름’이다. 한파 속에 둘리 벽화 거리를 걸으면 차라리 폭염이 더 낫지 싶다가도, 정작 무더위가 돌아오고 나면 거꾸로 다시 겨울을 원한다⋯⋯가 아니라 다시는 올 일 없는 90년대 내 유년기의 여름을 그리워한다.

잡설 끝.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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