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여름] #5
내내 쨍하던 하늘이 한바탕 소나기를 쏟고는 태연무심히 먹구름을 거두던 늦은 오후. 담뿍한 습기가 온 동네의 채도를 평소보다 짙게 적셔 놓았다. 일몰까지 세 시간은 더 남았는데 굼뜬 난운(亂雲) 무리 덕에 햇빛이 맥을 못 춘다. 다습함보다는 차라리 자외선이 낫겠다 싶지만, 비 오기 전 부지런히 발발대지 않은 내 게으름에 대한 벌칙으로 느직한 산책을 단행하기로 한다. 우중과 우후의 고도 지구 산동네 공기는 스프링클러 수십 개를 틀어 놓은 듯 척척지근하다. 푹 젖은 초목들의 이파리와 꽃가지, 인근 계곡과 개울이 동시다발로 물기운을 뿜어 대는 듯하다. 그래도 썩 싫지만은 않은 이유는 수분이랑 같이 둥둥 실려 오는 풀내 때문이다. 습도 탓에 꿉꿉하기는 해도 후각을 쾌청하게 자극하는 그 생초(生草) 향 덕에 ‘역시 나오길 잘 했어’ 하고 자족하게 된다.
비 그친 직후에 동네 길고양이를 보는 건 드문 일이다. 저마다 비 피할 데를 찾아 숨어들고는 날이 개도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기상 상황을 예의 주시하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도메스틱 숏헤어(이른바 ‘코숏’) 한 마리와 동거한 지 오래지만, 학명 펠리스 카투스(Felis catus)라는 포유류의 태생적인 신중함에는 아직도 감탄한다. 돌다리 건널 때마다 최소 다섯 번은 두들겨 보는 묵중함을 타고난 생명체들이랄까. 하지만 늘 예외는 존재하는 법. 느적느적 물러나는 구름떼와 먼산주름을 뒷배경 삼아 지붕 위에서 제법 늠름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녀석. 하필 또 내 집의 아이와 똑같은 ‘고등어 태비’다. 반가워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내가 꽤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뒷걸음질은커녕 오히려 더 등허리를 곧추세우는 모양새다. 경계 태세는 분명 아니다. 털도 안 세우고 ‘하악’ 소리도 안 낸다.
녀석의 시선은 지붕 아래의 낯선 인간이 아니라 얼마간 상공을 향해 있다. 그 모습은 흡사, 인간 등산객들이 정상에 올라 산밑 세상을 내려다보며 짐짓 지어 보이는 위용과도 닮았다. 야옹이의 호연지기(浩然之氣). 만화 ⟨라이온 킹⟩에서 왕족 사자들이 포효하던 ‘자긍심의 바위(pride rock)’ 못잖은 산동네 파란 지붕. 과연 천하는 종(種)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나 깃드는구나⋯ 분별심 따위 없는 저 웅혼한 기개⋯! 나도 하찮은 호연지기를 흉내내 본다.
고양이 한 마리가 품은 하늘과 땅 사이에, 나 같은 작은 인간도 풍경으로 들어설 수 있을까. 풍경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인간이 아닌, 야옹이가 올려다볼 수 있는 좋은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다, 라는 낯간지러운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던 그날. 세수한 아기 볼살 같은 산동네 코숏의 맑은 기운, 그리고 사방의 풀내가 하늘과 땅 사이를 노긋이 적셨던 늦저녁 산책길.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