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킬러

<아메리칸>

by 임재훈 NOWer





이 글에는 영화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습니다.






킬러(killer)는 타인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머더러(murderer) 역시 타인을 죽이는 사람입니다. 타인을 죽이는 것이 일(work)인 사람—살인을 의뢰받고, 그 의뢰자로부터 살인에 대한 보수(reward)를 받는 사람이 킬러입니다. 이와 달리, 자기 자신의 원한 풀이나 재미를 위해 타인을 죽이는 사람은 머더러입니다. 킬러는 말하자면, 타자(의뢰인)의 살해 욕망을 대신 해결해주는 사람입니다. 표적에 대한 감정은 없습니다. 표적은 그저 표적일 뿐입니다. 표적은 그저 표적이어야만 합니다. 직업으로서의 살인, 즉 킬러의 일처리 과정에는 킬러라는 주체(‘나’)가 나서면 안 됩니다. 철저히 냉철해져야만 합니다. 총구에 소음기를 장착하듯, 킬러는 매 순간 자기 감정을 뮤트(mute) 모드로 유지시켜야만 합니다. 또한, 일처리가 확실해야 합니다. 광분한 머더러는 방아쇠를 연신 당겨대며 살인하는 순간의 유희에 함몰되고 말지만, 킬러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한 발. 급소를 정확히 조준하고, 호흡을 멈추고, 도미노 블록을 놓듯 온 정신을 다 기울여 방아쇠를 당깁니다. 그렇게 일과는 지나갑니다.


<아메리칸>은 직업인으로서의 킬러를 건조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킬러는 남자입니다. 오프닝의 배경은 한겨울 고즈넉한 산장 안. 킬러는 한 여자와 함께 벌거벗은 채입니다. 여자의 농염한 나체가 한동안 프레임에 잡힙니다. 가느다란 팔, 캐나다의 보우 강(Bow River) 지대처럼 매끈하게 휘어진 어깨와 허리 곡선, 상대적으로 대단히 탄력적으로 부푼 둔부, 나긋한 고양이의 꼬리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천천히 반복하는 긴 다리. 한껏 달아올랐다가 서서히 열을 식히는 중인 듯 적당히 발그레한 여성의 몸이, 사정을 마친 페니스처럼 천천히, 이따금 꿈틀대며 킬러의 목을 감싸고 입을 맞춥니다.

다음 장면에서 킬러와 여자는 잔뜩 껴입고 설원을 산책 중입니다. 그때 본능적으로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총을 꺼내듭니다. 여자는 겁에 질립니다. 이윽고 킬러는 한 방향을 향해 몇 번의 총성을 울리고, 저격수의 시체 하나가 힘없이 굴러 떨어집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만큼, 제 자신도 살해의 위협에 늘 노출되어 있는 남자입니다. 일상적인 일입니다. 잘 처리는 했으나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킬러 세계와 무관한 여자가 이 현장을 봤기 때문입니다.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남자는 한 번 더 총을 쏩니다. 여자에게로.


ⓒ daum movie


이어지는 전반의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전개됩니다. 이곳에서도 킬러는, 대단히 비현실적으로 매력적인 육체를 가진 여성과 질퍽한 정사를 나눕니다. 벌거벗은 여성(창부)의 이미지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유는, 주인공 킬러가 그만큼 욕망에 굶주려 있는 인물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듯, 킬러의 살인 행위는 스스로의 욕망을 해결하는 차원이 아닌, 철두철미하게 타인(의뢰인)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킬러는 마을에서 줄곧 혼자 생활합니다. 이 영화는 친절하게도 킬러의 집 안 생활을 조명합니다. 체력관리를 위해 푸쉬업, 스트레칭 등을 정기적으로 실시합니다. 총기 조립에 필요한 각종 재료와 도구 들을 구하고, 정확하고도 여유로운 솜씨로 조금씩 완성해갑니다. 그러다 허기가 지면 밖에 나가 간단한 요기를 하고, 여자를 삽니다. 오메가 시계를 차고 총신을 꼼꼼히 살펴보는 잭(조지 클루니 분)의 이미지는 근사합니다. 혼자로서도 완벽해 보이는 한 남자의 샤프한 모습. 이 영화가 묘사하는 킬러는 이렇게 ‘혼자’이면서 ‘완벽’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완벽하면 타인에게 잔인해진다’, 혹은 ‘타인에게 잔인해지기 위해 자신에게 완벽해진다’라는 서늘한 명제가 이 영화에서는 읽힙니다. 요컨대 킬러의 생활 패턴이란 대략 이런 명제를 전제한다는 주제의식입니다.

영화 밖 프로의 세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의 완전무결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내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못 하면 프로의 세계에서 내쳐진다, 라는 프로세스의 유효함을 우리는 자주 인식합니다. 기업 조직이라는 프로의 세계가 위태로워지면, 즉 완벽하게 건재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면, 구조 조정이 가동되며 다수의 인력자원(human resource)을 거세합니다. 이때 ‘다수’라는 수치는 프로페셔널의 재건을 위해 정확히 계측된 결과값이지요.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 이쯤이면 되지 않겠나, 같은 막연한 감(感)이 아니라, 딱 떨어지는 100을 만들어야 하는 목적성을 갖고서 현재의 120, 130 중 20과 30을 말끔히 덜어내는 레시피인 것입니다.


킬러는 왜 고용되는가를 생각해본다면, 역시나 프로페셔널의 존립 문제로 귀결됩니다. 킬러를 고용한 조직, 혹은 개인은 자신들의 무결함에 방해되는 요소를 제거하기를 원하지요. 조직의 기밀 정보나 비자금을 유출시킨 자, 나의 치부를 알아챈 자를 말입니다. 조직의 세계, 나의 세계의 결함 부위를 알맞게 도려내는 일이 프로에겐 프로다움일 것입니다. 그런데 프로다움의 또 다른 덕목은 가시적 긍정과 비가시적 부정의 엄격한 구분이지요. 전자가 대외 홍보라면, 후자는 대내 정비입니다. 다름 아닌, 이미지 메이킹의 기술이지요. 여기에는 프로가 아닌 이들처럼 마음 편히 웃고 울고 짜증 부리고 그러다 다시 풀어지는 류의 감정 표현은 애초에 허가되지 않습니다. 120에서 20을 덜어내 100을 계량하듯, 면밀히 기획된 전략적 긍정과 감성 광고만이 프로들의 대외 이미지를 고수시켜줍니다. 그렇다면, 덜어낸 20은 어디에 있는가. <아메리칸>의 잭은 그 20만큼의 몫을 받아, 프로들이 덜어내고자 하는 20만큼의 아마추어들을 암살해주지요. 프로가 꾸준히 프로다움을 지속할수록, 즉 100이라는 완벽한 총량을 맞추기 위해 넘치는 베이킹 파우더를 감할수록, 킬러 잭의 생활은 유지되고, 프로의 세계는 노릇노릇하게 익어갑니다.


ⓒ daum movie


킬러 잭은 프로가 맞기는 합니다만, 결국엔 피고용인에 불과하지요. 클라이언트의 욕망을 대신 해결해주는 소모품인 것입니다. 물건이기는 한데, 좀 고급 제품이랄까요. 이런 킬러가 ‘나’로서의 욕망을 갖게 되자(한 여자를 아끼고, 킬러로서의 직책을 버리기로 하자) 효용성을 상실합니다. 프로들의 완벽함에 흠결을 낸 것이지요. 잭의 신분은 킬러에서 타깃으로 하락합니다. 클라이언트의 오더를 충실히 받든 영민한 신입 킬러가 어느새 잭을 엄습해오고 있습니다.

프로의 세계를 유지시켜주는 건 프로들이 아니라, 그들이 고용한 킬러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로들의 욕망을 대신 욕망해주는 킬러들 말입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욕망하기 시작한 잭, 그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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