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주말마다 완전 군장에 버금가는 거대한 사진 가방을 메고 전국 각지의 산을 오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아버지의 그런 취미가 못마땅했습니다. 언젠가는 설 이튿날 새벽에 산을 올랐다가 몸을 크게 상해서 돌아온 적도 있었지요. 이런 상황이 답답하여 ‘도로 내려올 산을 구태여 왜 올라가는가’ 하는 부아가 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주말에 어린 나와 놀아주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찾아 휘이 떠나버리는 데 대한 서운함이 짙게 깔려 있었을 것입니다. 이쪽에서는 애정을 보내는데, 저쪽에서는 계속 받아주지 않으면 이쪽의 마음은 탁해지기 마련이니까요.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외면당할 때, 그 마음은 그만 비뚤어져버리고 맙니다. 주말마다 산이며 들이며 강이며 전국을 여행하는 아버지가 그예 미워져서, 신문이나 TV에 암벽등반가나 탐험가의 인터뷰가 나오면 괜스레 열을 올려 비난해야 속이 풀렸습니다. 히말라야 등정에 나선 탐험대를 손가락질하며 ‘어차피 지상으로 내려올 텐데 왜 저런 고생을 사서 하는가’, ‘애오라지 지상의 인간들이면서 왜 저리 숭고한 척을 하는가’ 식으로 쏟아내고는 했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제가 애써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 하나는, 아버지가 ‘매주’, 그것도 30년 넘게 그 고생을 하러 꾸준히 나갔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왔고, 월요일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출근을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떠나고 돌아옴을 무수히 반복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건강한 신체와, 나의 잔뜩 찌푸린 얼굴을 보면서도 늘 웃어주었던 아버지다움을 어린 저는 쉽게 받아들이기가 싫었던 모양입니다.
<와일드>의 주인공 셰릴(리즈 위더스푼 분)의 노정은 고통이 팔할쯤 되고, 나머지가 얼마간의 희열입니다. PCT 하이킹(Pacific Crest Trail Hiking), 그러니까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약 4,200km를 도보로 통과하는 그녀의 노상은 팍팍합니다. 지난한 육로를 직진하고 우회하고 다시 직진하는 셰릴의 정서를 영화는 집요하게 관찰하지요. 떠남의 이유였던 상처와 원망, 너저분한 과거, 온갖 죄스러움 등등이 길 위의 그녀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셰릴은 그것들을 차분히 데리고 다니지요. 단 한 톨의 감정도 길바닥에 떨구지 않습니다. 얼룩이 묻은 채로, 딱히씻어내거나 털어내려는 몸부림도 없이 화도 내고 웃기도 하며 걸을 뿐입니다. 구원을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은 무자비한 개자식”이라고 씨근덕대며 줄기차게 걷는 그녀입니다.
셰릴의 과거사는 여행길 중간중간 회상의 형태로 밝혀지는데, 이런 일련의 회상 컷들이 틈입하는 시기는 대개 무난한 코스를 걷고 있거나 야영하며 휴식할 때입니다. 험준한 바위산을 넘어갈 때, 세찬 바람 탓에 텐트 설치에 애를 먹을 때, 험상궂은 남성으로부터 도망칠 때, 무릎까지 푹 빠지는 설원을 빠져나갈 때, 뙤약볕 아래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지쳐갈 때 등 고통과 공포가 극에 달한 순간에서는 회상 컷이 잠깐 쉽니다. 몸의 고됨은 정서의 하중을 잠시 잊게 하는 것인지.
<와일드>의 가장 와일드한 장면은 셰릴이 사막에서 방울뱀과 조우한 순간입니다. 대가리를 바짝 세우고 인간을 경계하는 뱀 앞에서 그녀는 얼어붙고 말지요. 소름 끼치는 방울 소리가 뱀의 전신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셰릴은 거기에 압도당합니다. 살금살금 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무사히 경계에서 벗어나자 그녀는 서둘러 직진합니다. 돌아보지 않는 줄행랑. 그러고 나서 방울뱀은 두 번 다시 셰릴의 길에 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셰릴이 전진하는 길이 프레임에 펼쳐질 때마다 예의 뱀이 혹시 훅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지켜보는 사람은 괜스레 마음을 조리게 됩니다.
실체가 있는 고통 앞에서는 무력해질수 밖에 없습니다. “내 이론은 그녀 앞에서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지”(나쓰메 소세키, <마음> 중)라는 회고에서 ‘그녀’를 ‘실체가 있는 고통’으로 바꿔도 썩 들어맞습니다. 절에서 백팔 배를 해본 적이 있는데, 한 오십 배쯤 넘어가면서부터는 부처님이고 소원 성취고 마음 내려놓음이고 뭐고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더군요. 그냥, 힘들었습니다. 백여덟 번째 배를 마쳤을 때, 그 힘듦이 소원 성취고 마음 내려놓음이고 뭐고 온갖 것들을 압도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혼잡한 정서란 육체의 감각 앞에서는 힘도 못 쓰는 비겁한 성질인가 하는 씁쓸함이 들면서도, 왠지 후련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백팔배란 요컨대 몸을 고되게 하여 마음에 낀 지방을 땀으로 배출하는 행위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비로소 '소원을 이루고 싶다',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라는 자아를 완전히 잊어보라는 것, 몰아로써 스스로를 다스리라는 것이 백팔 배의 본질이 아닐까 느꼈습니다. 실체적 질감으로서의 신체적 고통, 그것은 일종의 ‘윈도우 재설치’와 같은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현묘함이기도 한 걸까요.
다행히 뱀은 나를 물어 죽이지 않았다, 떠올리기도 싫은 경험이었지만 어쨌든 ‘뱀의 구간’을 벗어났다, 아니, 벗어났다기보다, 지나왔다, 그걸로 됐다, 그걸로 끝이다, 또 다른 고통을 향하여, 지금까지와 같이 계속 전진한다, 살아있으니까, 뱀에게 물려 다리가 마비되지는 않았으니까, 그대로 또 걷는다, 라는 체험의 인식. 길바닥의 셰릴의 마음은 아마 이렇게 오체투지를 하지 않았을는지.
살면서 맞닥뜨리는 숱한 아픔, 슬픔, 실망, 후회, 허탈, 환멸, 좌절 등등은 모두 저마다의 인생 노정에 도사린 방울뱀입니다. 일단 마주하면 멈출 수밖에 없지요. 그동안의 보폭과 행동 반경이 확 오그라듭니다. 뱀의 구간을 지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요. 녀석은 독성의 파충류입니다. 맨손의 인간으로서 대적해볼 방도가 없습니다. 뱀따위 손으로 잽싸게 멱을 잡아 따버리면 그만 아니겠냐, 하며 호기로운 조언을 해주는 자들도 있는데, 그들은 그들 나름의 길에서 그들에게 걸맞은 뱀의 구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뱀이 좀 더 클 수도.) 한 개인이 체험하는 고통이란 그리 간단히 멱을 따버릴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니까요. 이건 오롯이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뱀입니다. 죽이든 피해가든 상관없으나, 우좌지간 뱀의 구간은 반드시 지나야 합니다.
셰릴의 고생담을 얌전히 지켜보며 제 아버지의 뱀은 어디 있었을지를 헤아려봅니다. 제 아버지의 뱀은 무엇이었을지를 상상해봅니다. 혹시 그 뱀이 아들인 나는 아니었을까. 아들인 내가 일으킨 정서적 분란과 갈등과 허허로움은 아니었을까. 매주 반복된 아버지의 떠남은 그 뱀을 우회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몸짓은 아니었을까. 또한 매주 반복된 아버지의 돌아옴은 그 뱀을 끝내 포기하지 않겠다는 아비로서의 집념은 아니었을까. 피하고 싶다가도 돌아오고 싶은, 주말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 마음이란, 결국은 자기 삶의 뱀을 어떻게든 애완하고 싶은 인간의 정(情)이었던 것은 아니려나. 사랑, 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
떠남의 이유야 사람마다 사연 따라 가지각색이겠으나, 결국엔 어쨌거나 떠나고 싶었으므로 떠남을 행하는 것일 테지요. 그렇다면 왜 돌아오는가. 왜 돌아오고 싶었던 것인가. 신파 같은 말이겠으나,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일 겁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려는 마음 그 자체를 아직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사랑할 수 없는 대상을 후려치기보다, 제 몸을 고통 속에 이기어 좀 더 단단해진 굳은살을 박아가지고 회귀하고 싶은 심정일지도 모르지요. 사랑하려면 강인해져야 하니 말입니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타인을 바꾸려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지요. 타인의 자연한 신체와 성정을 오롯이 사랑하는 일이란, 시절이 필요하며 굳센 결의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셰릴은 뱀을 피하여 전진했습니다. 그러나 뱀은 셰릴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 그 길에서 줄곧 살아갈 것입니다. 한 마리만도 아니겠지요. 셰릴이 텐트를 쳐놓고 불을 지피고 죽을 쑤어 먹고 밤을 보낸 숱한 땅 밑에 얼마나 많은 뱀들이 잠들어 있었을지.. 다만 그들이 고개를 쳐들지 않았을 뿐.
삶의 먹잇감이 될 바에 삶의 천적으로 강성해지고 진화하고 싶어서, 나의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해야 했던가. 그 반복 속에서 또 얼마나 많은 밤을 쩔쩔매며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뱀을(혹은 아들을) 두려워 했을 것인가.
지상의 모든 떠난 이들이 걸었을 길과 남겼을 발자국과 떨었던 밤들을 떠올리며.
그것들은 모두 돌아오는 길이었음을 기억하며.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