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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이별 방식

<비긴 어게인>

by 임재훈 NOWer

예술가와 보통 사람의 차이를 묻는다면, ‘몰입(immersion)’이라 답하고 싶습니다. 확실히 예술가들은 뭔가에 잘 잠겨듭니다(immersed). 수영장에서 잠수했을 때를 상상해보지요. 제대로 들리는 거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물속에서 아무리 크게 고함을 친다 한들, 그건 그저 이명처럼 뿜어져 나왔다가 물거품과 함께 사라질 뿐입니다. 유일하게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입니다. 단순히 물속에 잠겨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수중에서 스스로에 대한 몰입도가 압도적으로 강력해질 수 있는 까닭은, 일시적으로 숨을 쉬지 않고 있어서입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대야 한가득 물을 떠놓고 숨 참기 대결을 해봤던 장난꾸러기들이라면 금세 이해할 것입니다. 대야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동안에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상대편 친구 놈이 과연 잘 참아내는 중인지, 나는 이대로 얼마나 버틸 것인지 따위의 생각일랑 안 하게 되지요. 아니, 못 하게 됩니다. 끝내 대야 밖으로 고개를 다시 처들었을 때, 그리고 격렬하게 호흡하며 숨 고르기를 할 때, 비로소 나 이외의 대상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몰입이란 이런 것입니다. 물속에서 숨을 참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 아,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해야 합니다. 숨을 참은 채로, 주변 상황이야 어찌 됐든 거의 완벽할 만큼 블러(blur) 처리된 환경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그 일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물 밖으로 다시 나올 수가 없는 마력적인 상태. 그걸 누군가는 선물이라고도, 혹은 저주라고도 부르는데, 어쨌거나 그것이 바로 ‘예술가의 몰입’입니다.


역시나 선물인지 저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몰입 잘 하는 예술가들은, 그래서 사랑도 잘 합니다. 알랭 바디우가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예술가들만큼 그 말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이들이 또 있을까요. 둘 사이에는 그 무엇도 틈입할 수가 없습니다. 예술가가 사랑할 때, 사랑의 주체로서 살아가기 시작할 때, 그 시간의 입자는 매우 촘촘하고 견고합니다. 수영모와도 같은 것이지요. 외부 환경(물)에 젖기야 하겠지만, 그 내부의 머리칼은 언제나 보송보송하게 유지됩니다. 사랑에 빠진 예술가의 전신에는 굉장히 농밀한 방수막이 생겨서, 그 무엇도 침투하지 못 하도록 막습니다. 몰입의 결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오로지 나, 그리고 대상만 존재하는 무균의 밀실에서, 사랑이라 불리는 것이 자랍니다.


이건 확실히 저주일 것입니다. 예술가가 사랑이라 불리는 결계지에서 끌려나오는 순간, 그(그녀)에게 씌워진 수영모가 벗겨져 다시 세속의 균에 감염되는 순간, 그(그녀)가 소중히 길렀던 꽃은 급속도로 시들고, 언제나 방금 건조시킨 타월처럼 향기롭게 준비돼 있던 머릿결은 순식간에 상하고 맙니다.(누군가의 그것은 금방 걸레처럼 너덜거리게 되기도 하지요.) 이별을 경험하는 예술가는, 사랑할 때 그랬듯, 또 다른 몰입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건 어쩌면 선물일 것입니다. 예술가는 이별과도 사랑에 빠집니다. 이별이라는 대상에 무섭도록 몰입하여 숨을 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합니다. 울고, 자책하고, 그 사람을 붙잡아보기도 했다가, 결국 그 사람을 원망하고, 그러다 다시 울고, 자책하고, 그렇게 물속에 잠긴 듯한 시간을 살아냅니다. 이 모든 과정이 이별에 빠진 예술가가 스스로 해야만 한다고 결심한 것들입니다. 이것들을 하나씩 다 작업하고 완성해야만 그(그녀)는 다시 숨을 쉬러 나옵니다. 아무도 이 예술가를 숨쉬게 할 수 없습니다. 이별에 빠진 예술가를 위해 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거리를 두고 기다려주는 것이지요. 작업이 잘 진행되도록, 그리고 잘 마무리되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예술가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다시 숨을 쉬러 나왔을 때 만약 아무도 없다면, 아마도 이 예술가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하고는 다시는 숨을 쉬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영화 속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 분)처럼, 제 삶 전체를 낡은 가방 안에 우겨 넣고, 지하철역에서 안전선 밖으로의 깊은 한 발짝을 떼는 일 같은. 그런 용기를 감히 내지 못하도록, 타인들은 예술가들을 연약하게 유지시켜주어야 합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예술가들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 세계와 사랑에 빠지도록, 그리하여 대단히 거대한 몰입의 밀실을 예술가 스스로 가꿀 수 있도록 말입니다.


02.jpg ⓒ daum movie


이별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어쩌면 선물일지도 모른다고 한 이유는, 어떤 예술가는 이별을 겪어내며 가사를 짓고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숨을 쉬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해낸 결과입니다. 숨을 참고 있던 예술가가 마침내 물속에서 기어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곱게 참아낸 모든 숨을 다 내뱉으며 말입니다. 아무도 그 노래를 듣지 못 했습니다. 물거품처럼 부글거리며 잠시 파장을 일으키고는 곧 잠잠해졌습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예술가는 사랑을 했고, 이별에 몰입했고, 물속으로 들어가 노래를 불렀고, 온 숨을 다 토해냈습니다. 이제 참아낼 숨이 남지 않았습니다. 바로 지금, 다시 숨을 쉬러 물 밖으로 고개를 들 시간입니다. 예술가가 드디어 잠수를 끝냈습니다. 시작(begin) 한 번에 숨을 들이쉬고, 다시(again) 한 번에 숨을 내쉽니다. begin, again, begin, again. 숨을 고르듯, 어느 예술가가 다시 시작하려 합니다.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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