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외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몇 겁의 우주적 시간을 거쳐 인간은 지구라는 별에 정착해 번식하게 되었습니다. 우주에 비하면 보잘것 없지만, 지구의 기준으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고고학이라든지 우주선이라든지 항성 간 이동 같은 것들이 발전했고 실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 과학자들은 인류의 창조자인 외계 존재들을 찾아 떠나는 기원으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세계관은 대략 이렇습니다. 창조론 대 진화론이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 대 ‘인간은 우주의 원리에 의해 생성되었고 스스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의 대립이라면, <프로메테우스>는 제삼의 주장을 펼치는 셈입니다. 외계인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파격적인 가설을 말이지요. 하지만 이 파격이 <프로메테우스> 이야기의 중심은 아닙니다. (신이든, 외계인이든, 그 누구에 의해서든) '창조된 존재가 자기 창조주에게 가 닿기'라는 모험이 중핵사건이지요.
이 작품을 연출한 리들리 스콧 감독은 <블레이드 러너>, <킹덤 오브 헤븐>과 같은 전작들을 통해 '창조된 존재가 자기 창조주에게 가 닿기' 모험을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아마도 그 자신이 이 '모험'에 천착해오고 있고, 어쩌면 영화 만들기 자체가 그에겐 이 '모험'의 일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는 인간에 의해 창조된 안드로이드가 '수명'이 아닌 '생명'을 획득하려는 상황, 스스로를 인간으로 착각하고 있는 상황이 동시에 벌어집니다. 이 와중에, 안드로이드 폐기 처리 전문 인력인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는 레이첼(숀 영)이라는 여리고 아름다운 안드로이드와 사랑을 나눕니다. 레이첼이 바로 자신이 인간인 줄 알았던 비극의 주인공인데, 데커드는 그녀를 상대로 연민을 넘어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됩니다.(훗날 <글래디에이터> 개봉 즈음하여 가진 인터뷰에서 리들리 스콧이 직접 밝힌 내용인데, 실은 데커드도 안드로이드였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은, 서로 다른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피조물들(기독교인과 아랍인)의 격돌을 그렸습니다. 다름 아닌 십자군 전쟁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격돌은, 양측이 저마다의 창조주에게 가 닿으려는 모험이 '예루살렘'이라는 성지에서 그만 충돌을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아시다시피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공동의 성지인데, 영화 밖 현실에서도 여전히 그들 각자의 모험들은 격렬히 부딪히고 있는 중이지요. 모험과 모험의 충돌 탓에 성지는 전장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 영화는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발리안(올랜도 블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이 영화가 지향하는, 혹은 제안하는 '천국의 왕국'이란 이렇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의 기도문을 들으며 발리안이 말하지요. “우리의 기도와 비슷하군요(Sounds like our prayers).” 여기서 ‘우리’란 ‘기독교인들’입니다. 이 짧은 대사와 연관 지어 읽어볼 만한 글이 있는데 뉴스앤조이에 게재되었던 김백형 목사라는 필자의 글입니다. 아래 구절.
“모든 종교는 각자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이 사실은 그 종교를 유지하고 궁극적으로는 그 세계관 자체가 그 종교 자체입니다. (…)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실 모두가 종교인이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어떠한 종교 곧 세계관에 근거해서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국가마다 문화마다 서로 다른 신을 섬깁니다. 무신론자도 있지요. 이들을 설명하는 데 “세계관”이라는 테마를 사용했다는 점이 매우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블레이드 러너>, <킹덤 오브 헤븐>, <프로메테우스>는 '창조된 존재가 창조주에게 가 닿기 모험'을 미래 사회와 중세를 배경으로 펼쳐놓은 서사극입니다. 앞서 인용한 글의 "세계관" 개념을 끌어와본다면, 이 세 편의 작품들은 단지 '창조주/피조물(창조된 존재)' 구조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나/나' 구조로도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극중 캐릭터들의 '창조주에게 가 닿기'라는 형이상항적 행동목표는 결국, '나'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 나의 세계관의 주인으로 존재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프로메테우스>에서, 초반에 인조인간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 분)이 동면 중인 닥터 쇼(누미 라파스 분)의 꿈을 디스플레이 윈도에 활성화하여 감상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꿈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비추고 있습니다. 배경은 아마도 인도인 듯합니다. 현지인들의 장례 의식이 진행되는 중입니다. 어린 쇼가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왜 저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나요?” 아버지가 답합니다. “저들은 내 도움이 필요 없단다. 저들은 우리와 다른 신을 섬기고 있거든(They dont’t want my help. Their God is different than us).” 그러면서 아버지는 죽은 아내(쇼의 어머니)가 지금 이 세상보다 더욱 아름다운 천국에 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덧붙입니다. 딸은 또 묻습니다. 아름다운지 어떻게 아느냐고. 이어지는 아버지의 대사가 근사합니다. “그게 내가 믿기로 선택한 바란다(That’s what I choose to believe).”
누구나 저마다의 세계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 세계 안에 종교도 있고 가치관도 있고 꿈도 있고 목표도 있으며 희망이 있습니다. 그 모든 ‘세계’는 영화 속 대사처럼 “Choose to believe”의 세계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걸 존중해야 할 필요가 있지요. 아니, 굳이 존중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최소한 침범이나 정복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개인에게 내가 옳다고 믿는 사고방식을 주입시키고자 하는 행위가 일종의 내적 습격이지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조언이라는 것을 할 때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입니다. 침해가 되지 않도록, 공격이 되지 않도록, 타인과 관계 맺는 매 순간 ‘협상’의 시점을 어느 정도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이른바 ‘멘토’라 불리는 유명인사들의 행동양식은 다소 위험합니다. ‘멘티’들의 내면으로 파고들기 때문이지요. 그걸 충분히 방어할 만한 감성적, 이성적 수비력이 견고하다면 문제 없을 테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강력한 내면을 가진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자기 내면에 성벽을 두르자는 뜻은 아니지만, 저돌적인 멘토와 여린 멘티의 문제라면, 성벽은 존재하는 편이 낫지 않을는지요. 그 누구도 누군가의 ‘엔지니어’가 될 수는 없습니다. <프로메테우스>의 클라이막스처럼, ‘엔지니어’에게 너무 근접했다가는 그 존재에 의해 ‘나’라는 개인이 파괴될지도요.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