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시>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드러머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한 청년이 미국 제일의 음악학교에 입학합니다. 곧 교내 재즈 밴드 일원이 되지요. 밴드 지휘자의 카리스마가 가히 압제적이라 할 만큼 살벌합니다. 자기 성에 차지 않는 연주자를 연습 중에 내쫓아버리는가 하면, 자신의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몰아세우고, 심지어 구타와 욕설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밴드라기보다는 군대의 분대 같은 분위기입니다. 단원들의 심리적 압박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만큼, 연주의 질은 급상승하고, 실제로 연주대회에서 1등상을 거머쥐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악명 높은 이 지휘자의 ‘기준’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납득이 갈 만한 것이기는 합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단원들과, 그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가서 기어이 (본인의 기준에서) 최상의 연주를 얻어내고야 마는 지휘자의 철저한 상명하복 관계가 이 밴드를 ‘1위’로 유지시켜주고 있습니다. ‘보통 이상’이 된다는 것은 엄혹하고 참혹한 수련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지휘자는 줄곧 강조하지요. “‘음학’이 아니라 ‘음악’”이라고 말했던 우리나라의 어느 뮤지션을 이 지휘자가 만났다면, 그 자리에서 꺼져버리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청년은 지휘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문자 그대로 ‘피나는’ 연습을 거듭합니다. 드럼 스틱에 묻은 핏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휘자는 청년을 극지로 내몹니다. “이건 내가 말한 리듬이 아니잖아(Not my tempo)!” 수차례 뺨을 후려갈기고, 의자를 집어던지고, 드럼셋에 앉아 눈물을 흘리는 청년에게 질질 짜지 말라며 고함을 지르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지휘 방침에는 지휘자 나름의 모티브가 있습니다. 그가 입버릇처럼 예시로 드는 조 존스(Jo Jones)와 찰리 파커(Charlie Parker)의 일화가 바로 그것이지요. 드러머 조 존스가 찰리 파커의 한심한 실력에 분개하여 그의 머리로 심벌을 내던져버렸고, 그 사건에 자극을 받아 찰리 파커는 지금의 찰리 파커가 될 수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청년은 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라고 긍정하지요. 지휘자가 죽도록 밉지만, 최고의 드러머가 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내 머리로 날아오는 심벌 정도는 참고 맞아줘야 하는 것입니다.
앉으나 서나 드럼 생각이라 해도 될 만큼, 청년은 몹시 터프하게 헌신하여 지휘자가 원하는 만큼의 연주 실력에 도달하지요. 그러나, 결국 관계가 어그러지게 되는 것은 힘 빠지게도 ‘지각’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고(게다가 드럼 스틱 챙기는 걸 깜빡하기까지 지..), 그걸로 끝. 청년 드러머는 지휘자의 멱살을 잡고 “이 개새끼! 죽여버리겠다!”를 일갈합니다. 밴드를 관두고, 연습실 벽에 붙어 있던 드러머 버디 리치(Buddy Rich)의 포스터를 다 떼어내고, 멘토나 다름없었던 그의 음반까지 다 내다버립니다. 여기서부터,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청년은 진짜 예술가로서 한 템포 앞서가기 시작합니다.
<위플래쉬>는 청년 드러머 앤드류(마일즈 테일러 분)의 ‘자기다움’과 지휘자 플레쳐(J.K. 시몬스 분)의 ‘기준’을 동시에 긍정합니다. 그러나 결국, 궁극의 경지는 ‘자기다움’이며, 그 경지에 가 닿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기준’이라는 벽들을 넘어야만, 아니, 더 나아가 후려치고 철저히 파괴시키고 그리하여 그 ‘기준’ 위에 서야만 한다고 웅변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카네기홀에서의 JVC 재즈 페스티벌 개막 공연 장면이야말로, <위플래쉬>가 관객들에게 음악의 형태를 빌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일 것입니다. 플레쳐는 어쩌면 한 개인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속삭이고 때로는 호통치는 불안과 좌절과 절망과 비극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캐릭터일지도 모르지요. ‘절망의 철학자’라 불리는 에밀 시오랑은 “내가 아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철저히 때려부순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제언에서 ‘내가 아는 것’이라는 부분에 밑줄을 긋고 싶습니다. 영화 속 앤드류가 ‘아는 것’이라 하면, 플레쳐와의 갈등, 스스로에 대한 실망, 타인들로부터의 인정 욕구(이 영화에서는 이를테면 가족. 저녁 식사 장면을 떠올려본다면…) 등등이지요. 앤드류는 자기가 아는 것을 어느 순간에 무대에서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악보도 없이, 지휘자도 무시한 채로 앤드류는 독단의, 아니, 단독의 연주를 시작하는데, 이때 또다시 외부의 목소리가 들어옵니다. 플레처입니다. “이 새끼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이에 대한 앤드류의 대답은, 그야말로 득음입니다. “내가 큐 사인을 줄게요(I cue you)!” 거기에 수긍하며 그 흐름 그대로 앤드류의 큐 사인을 집중하여 기다리는 플레처 또한, 이제야 비로소 독단이 아닌 단독의 지휘자로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 순간, 객석은 보이지 않게 되지요. 재즈에서 말하는 '웨일(wail, 일반적으로는 '울부짖다'라는 뜻. 재즈의 경우, '멋들어지게 연주하다'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의 경지가 아닐까. 밴드란 그런 게 아니던가요. 각자의 단독성이 깃든 연주가 한데 어우러지는 것. 누가 누구의 템포에 무작정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의 ‘템포’를 갖춘 이들은 그 어떤 타성의 ‘템포’마저 자기 것으로 표현해낼 수 있지요. 템포를 맞추되, 그 템포에 함몰되지 않는다, 그것이 관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플래쉬>는 신세대 앤드류, 기성세대 플레쳐가 음악을 통해 성숙해가는 내면의 성장 영화가 아닐는지.
“내가 지금까지 이룬 거의 모든 것, 그것들은 온전히 나 스스로의 크리에이티비티로 해낸 것들이다. 드럼 연주에 관하여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을 만 명의 드러머들을 모아놓고라도 말해주고 싶다.”
Almost everything I've done, I've done through my own creativity. I don't think I ever had to listen to anyone else to learn how to play drums. I wish I could say that for about ten thousand other drummers.
_ 드러머 버디 리치
“당신은 당신만의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고 나서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라. 그런 다음, 마침내 무대에 올랐을 때는 전부 다 잊어버리는 거다. 그렇게 정말로 멋진 연주를 해버리는 거다.”
You've got to learn your instrument. Then, you practice, practice, practice. And then, when you finally get up there on the bandstand, forget all that and just wail.
_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