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14
동네 주택가 화분에 세워진 안내판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는다. ‘꽃은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진지한 궁서체나 바탕체가 아니라 획이 굵고 장평이 넓은 편인 돋움체다. 분명히 인쇄된 글씨임에도, 엄한 어른이 아니라 순박한 꼬마가 또박또박 쓴 손글씨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안내문 좌측 상단에 자치구 로고도 박혀 있다. 구 차원에서 예산을 들여 제작한 공공 시설물인가 보다. 꽃을 꺾지 마시오, 화분을 훔쳐가지 마시오, 라는 말을 이렇게도 다정하게 시각화할 수 있구나 싶어 감탄하게 된다.
만약에 ‘꽃 꺾기 발각 시 경찰 신고’, ‘화분 절도범 형사 처벌’ 같은 엄중 경고였다면 어땠을까. 그러니까 ‘하지 마시오. 안 그러면~(Don’t do it or~)’ 식의 구문(構文) 말이다. 그런 경고문 앞에 선 가상의 드라마 속 등장인물을 한번 상상해 본다. 그 혹은 그녀는 두 대상을 감지할 것이다. 첫 번째로는 경고 메시지의 수신자로서 공공 기관, 민간 단체, 개인 등 메시지 발신자를 추측해 본다.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다음 떠올리는 대상은 불특정 다수다. 등장인물은 얼굴도 모르는 타인들에 대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선입관을 갖는다. 이 대목에서 두 갈래 독백을 설정할 수 있다. 하나는 긍정적 사고. “이 동네 사람들은 꽃 한 송이도 참 소중히 여기나 보네.” “주민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화분을 가꿨으면 그걸 훔쳐가는 사람이 다 있을까.” 다른 하나는 혐오의 감정이다. “꽃 꺾는다고 벌금을 물려? 사람들이 얼마나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까지 해. 으이그.” “아니 훔칠 게 없어서 남의 집 화분을 가져가? 동네 수준 참⋯.”
허구의 상황을 가정해 본 것이긴 한데, 이런 유난스러운 상상도 ‘~하지 마시오’라는 말에 대한 여러 ‘응답’ 중 하나일 수 있다. 문법적 측면에서 경고문은 명령문에 해당한다. 명확한 대상 또는 불특정 다수에게 ‘말 걸기’ 형식을 띠기 때문이다. 요컨대 발신자와 수신자가 명확히 나뉘어 있다. 상대가 꽃을 꺾지 말라고 말을 걸어왔으니, 듣는 입장에서는 ‘알았다’거나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냐’ 등등의 응답을 하게 마련이다. 발신자 즉 ‘사람’이 실재하지 않는 경고문의 경우, 수신자는 말없이 실천하거나(꽃 안 꺾기) 나처럼 요상한 상상을 해 보는 식으로 ‘응답’을 할 수도 있다.
‘꽃은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경고문을 대신한 이 평서문은 거의 혼잣말에 가깝다. 청자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남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 자기 감상을 담담히 읊조린 한 줄 메모 같기도 하다. 그 앞을 지나는 행인에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지. 역시 꽃은 꺾으면 안 되는 거지.’ 하고 사실상 응답을 하게 된다. 꽃의 아름다움의 근거를 ‘꽃이 피어난 그 자리’에서 찾으려는 마음씨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래요. 맞아요.’ 하고 속엣말을 건넨 것이다. 기실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남의 말에 답을 한 게 아니라,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내가 먼저 말을 건 셈이다.
~하지 마세요 류의 경고문보다는 확실히 평서문을 활용한 완곡어법 쪽이 훨씬 입체적이고 감각적인 언어 소통을 구현하는 것 같다. 완곡어법을 의미하는 영단어 ‘euphemism(유피미즘)’의 어원이 옛 그리스어라고 한다. ‘좋다’라는 뜻의 ‘eû(유)’와 ‘계시의 말’을 가리키는 ‘phḗmē(피미)’가 합쳐진 말이라고. 언어에는 예언적 힘이 내재돼 있으므로 가급적 좋은 말을 반복할수록 불운을 피할 수 있다, 라는 오랜 어의(語義)가 오늘날 유피미즘으로 전승된 게 아닐까 싶다. 신비로운 완곡어법의 세계. 마법을 수련하듯 열심히 연습해 봐야겠다.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