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15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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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담벼락. 하얗게 페인트칠한 목패에 빨갛게 세로쓰기한 네 글자. 주, 차, 금, 지. 궁서체 폰트라고 해도 믿을 만큼 글씨체가 정갈하다. ‘주’부터 ‘지’까지 내려오는 글줄도 흐트러짐이 없다. 쓴 사람의 진심이 느껴진다. ‘절대로 이곳에는 주차하면 안 됩니다.’ 하지만 떡하니 경차 한 대가 세워져 있다. 두 가지 경우를 짐작해 본다. 하나, 팻말을 직접 쓰고 매단 주인의 차량. 둘, 누군가의 무단 주차. 그런데 만약 ‘주차금지’ 목찰을 몰래 떼 버린다면? 경우의 수는 사라진다. 차가 있건 없건 그저 무심한 풍경이 되고 만다. 주차된 ‘모닝’은 그저 이 근방에 정차한 여러 차종들 중 하나에 불과해진다. 차주가 누군지도 ‘안물안궁’이다. 존재의 주목도를 상실하는 것이다.

적갈색 담벼락. 주차된 스쿠터의 사이드 미러 반사광이 벽면 한 부분을 탐조등처럼 비추고 있다. 아무런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빛. 아무 말도 안 하는 빛. 그런 건 아무도 떼 갈 수 없다. 오토바이 핸들을 꺾어 벽에서 빛을 치울 수는 있다. 그래 봐야 바뀌는 거라고는 반사 각도일 뿐. 빛은 별일 아니라는 듯 새로운 자리를 제자리처럼 차지하고는 또 비춘다. 심지어 빛은 고정된 형태도 갖추지 않는다. 자기 본연의 성분을 모든 반짝이는 타자들에게 뿌린 뒤, 그들의 몸 일부—떼어지고 꺾이고 치워지는 물리적 실체를 그대로 복사한다. 그러고는 세상 어디에나 지워지지 않는 빛-자국을 남긴다. 주택가 돌담에 맺힌 사이드 미러 모양의 반사광은, 실은 오토바이가 여기에 멈춰섰다(여기까지 달려왔다)는 표시다. 누구든 보고 존중하라는 의미로 빛이 인간 세상에 남겨 둔 표식. 오토바이 차주의 흔적이기도 하다. 어떤 분일까. 골목에서 뵈면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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