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12
고도 지구의 가을 산은 관대하다. 보통은 제 몸의 정상이나 갓머리까지 오른 등반객들에게만 허락하는 울긋불긋한 능선의 장관을, 고도 지구의 산은 누구에게나 쉽게 보여 준다. 5층 건물 카페의 옥상에만 가도 가을색을 두른 산등성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냐오냐하면 애들 버릇 나빠진다는 옛 어르신들 말씀처럼, 동네 산이 이리도 활협하니 안 그래도 운동 싫어하는 나 같은 녀석은 더더욱 등산이랑은 담을 쌓게 된다. 산에 가는 대신 동네 카페만 자주 찾는 것이다. 심지어 옥상까지 계단을 오르는 것도 아니다. 엘리베이터라는 ‘치트키’를 사용한다.
이런 편법(?)에 완전히 맛들여가지고 가을에 주살나게 카페 옥상을 드나들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던 터라, 집에서 2킬로미터 거리인 그 카페를 걸어서 다녔다. 그래 봐야 고작 왕복 한 시간이었지만.
카페가 대규모 개편을 위해 운영을 잠정 중단하면서 내 소일거리도 사라졌다. 투정이든 어리광이든 다 받아 주시다가 별안간 엄해지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하듯, 동네 산이 평소보다 훨씬 높고 낯설게 보인다. 이제 진짜로 어른이 될 시간인가. 공부 열심히 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히 바른 길로 나아가야 할 때인가. 그렇게 산다 해도 어릴 때처럼 어른들의 칭찬을 바라면 안 되는 나이. 내가 이미 어른이니까. 어른이 어른을 진심으로 예뻐해 주는 일은 어른들의 세계에선 잘 일어나지 않는다. 손쉽게 엘리베이터 타고 세뱃돈 받듯 가을 산경(山景)을 품에 챙기는 일은 이제 그만둬야겠다.
원, 별⋯. 등산하기 귀찮다는 변명을 참 잘도 배배 꼬아 늘어 놓고 있다.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