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 간다

[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11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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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찜통 더위에 흔히 쓰는 말이 ‘익다’라는 동사다. 한낮 열기가 찜솥 훈김마냥 뜨거울 때 ‘익는다 익어’ 혹은 ‘익겠다 익겠어’ 같은 식으로 활용한다. 백사장 뙤약볕에서 휴가를 보내고 온 친구한테 ‘너 피부 완전 익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 관용구가 곱씹을수록 재미있는 것이, 사람이 스스로를 음식에 비유했다는 점이다. ‘가스불에 쪄지는 만두나 생선처럼 내 몸뚱이가 폭염 불볕에 익어 간다.’ 말속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고 자기 파괴적인 표현인데, 막상 실제 언어 생활에서 귀로 감각하는 말맛이란 그저 익살스러울 따름이다. 이성과 감성의 영역이란 이렇게나 신비롭다.

가을도 여름처럼 ‘익는’ 계절이다. 너른 논땅에는 벼가 무르익고, 감나무마다 홍시와 대봉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추석을 앞두고는 시장과 마트 진열대에 탐스러운 갈빛의 햇밤들과 보얀 깐 밤들이 그득하다. 이 밖에도 가을에 익는 농작물들은 쌔고 쌨다. 이렇듯 많은 것들이 익어 가는 계절인데, 여름에 그러하듯 사람한테 ‘익는다’는 표현은 잘 안 쓴다. 당장 나부터도 스스로에게든 타인에게든 가을에 그런 말을 해 본 기억이 없다. 여름의 익음이 센 불이라면 가을은 약불인 셈이라, 오히려 거부감 없이 더 자주 ‘나란 녀석 참 잘 익었다 올해도’ 같은 식의 말놀이를 할 법도 한데 말이다. 조심스레 추측을 해 보자면, 더워서 쪄 죽겠는 고통을 표출하는 ‘셀프 디스’엔 익숙하지만 스스로 ‘잘 익었다’고 칭찬하기는 영 멋쩍고 면구스러운 게 아닐까.

익어 가는 벼처럼 사람들도 가을에는 수굿이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 같다. 직장인이라면 상반기 결산과 하반기 신사업 추진을 동시에 처리하고, 학생이라면 방학을 끝내고 새 학기를 시작하는 시점이다. 아무래도 여름내 달뜬 마음이 착 가라앉는 계절이므로 언어 표현이 발랄하게 나오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하기야, 열매 맺을 때 소리 내는 식물도 없는데 사람이라고 다를까. 찜기 안의 만두조차 별 소리를 안 내는데.

이직을 위해 지원한 회사들, 책 출간을 목표로 투고한 출판사들 모두 여름에 이어 가을에도 묵묵부답이다.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는 조용한 계절이다. 익어 가는 것들은 대부분 조용하니까, 나도 익어 가는 중이려니, 불평하려는 입을 가만히 다문다.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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