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10
컴퓨터와 스마트폰 운영 체제에는 ‘고대비’라는 설정이 있다. 화면의 색상 대비를 높여 사용자가 좀더 명확하게 텍스트 및 이미지 정보를 인지하도록 돕는 기능이다. 나는 맥북 두 대 모두 ‘대비 증가’ 옵션(설정 > 손쉬운 사용 > 디스플레이)을 켜 놓았고, 메인 메일함인 구글 지메일도 ‘고대비 테마’로 이용 중이다. 아이폰은 대비 증가를 적용하면 오히려 침침해지는 것 같아서 그냥 기본 상태로 쓴다. 어디까지나 내 눈이 그렇게 느낀다는 얘기다.
고도 난시 탓인지 디스플레이 패널을 장시간 바라보면 눈앞의 상이 흐릿해진다. 문서 작성 툴을 띄워 놓고 두세 시간 줄글을 입력해 나가는 동안 흰 바탕의 검은 글자들이 잉크 번진 것처럼 보이는 식이다. 다크 모드라면 좀 괜찮을까 싶었는데 막상 써 보니 오히려 반대였다. 검은 바탕의 흰 글자들은 그 뭉개짐 정도가 훨씬 심해서 안구 통증과 두통마저 야기했다. 그런데 이건 사람 눈에 따라 다른 ‘케바케’ 현상인 듯하다. 나처럼 난시가 심한 어떤 지인은 다크 모드를 오히려 편안해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찾아낸 자구책이 바로 고대비 모드였다. 확실히 시각 피로도가 줄어드는 느낌이어서 줄곧 애용해 오고 있다.
내가 눈에 유달리 민감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을은 나에게 시각적으로 가장 편안한 계절이다. ⋯라는 건 역시나 시답찮게 현학적인 소리고, 그냥 다른 계절들에 비해 색상 대비가 높은 편인 가을 풍경을 아끼고 좋아한다.
맑은 날 새파란 하늘과 샛노란 은행나무를 보는가 하면, 먹구름 낀 날에는 평소보다 채도를 낮춘 소나무들을 감상한다. 한날 한 공간임에도 이 길엔 불긋한 단풍잎이, 요 길엔 상록수 숲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모든 배경마다 존재하는 행인들도 온통 알록달록하다. 단풍놀이를 겸해 가볍게 산 타기 퍽 좋은 절기라, 평일에도 아웃도어 룩 특유의 형형색색 옷차림을 한 등산객들을 자주 본다.
고대비에 익숙해진 어릿보기눈이 종일 편안함을 느끼는 가을의 색채감. 이 좋은 눈 컨디션으로 양질의 글을 듬뿍 생산해 내야 한 텐데, 그러자니 또 눈이 아파 집밖만 발발거리며 ‘가을 한량’ 행세나 하고 있다는 결론. 우리말에 마흔 살 안팎의 사람을 이르는 ‘가을 나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마침맞게 내 나이가 딱 그 계절인바, 진득하니 앉아 있질 못하고 자꾸만 밖으로만 돌려는 기질도 어느 정도는 자연의 섭리가 아닐까나.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