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 900 터보

[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17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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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평일처럼 오후 업무(라고는 부르지만 실은 집에 가만히 앉아 글쓰기)를 마치고 산책하러 나섰다. 설렁설렁 동네를 걷다가 특별한 피사체를 발견했다. 빨간색 ‘사브 900 터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2021)의 그 ‘카’다. 차종뿐 아니라 색상도 같다. 실은 지난여름 장마철에도 이 차를 본 적 있다. 집 앞 도롯가 할인 마트 앞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때도 꽤 놀랐었다. ‘영화 속 자동차’를 현실에서, 무려 동네 마트에서 보게 될 줄이야. 뭐 그럴 수도 있지, 라고 넘기기에는 대상의 시각성과 존재성이 너무나 비일상적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러닝 타임이 약 세 시간이다. 긴 영화를 버거워하는 관객인지라 극장에서 꽤 힘들게 감상했다. 제목처럼 ‘마이 카’를 ‘드라이브’하는 여러 장면들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마치 노령견과 산책하듯 오랜 구식 차량을 요령껏, 그리고 천천히 몰아 목적지로 향하는 주인공의 운전 성향이 꼭 삶의 태도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저 나아갈 따름이다. 내가 정한 제한 속도로, 온 힘을 다해.’ 드라이브 씬마다 얹어지는 이시바시 에이코의 잔잔한 전자음악들—주인공의 사브 900 터보가 걸어가듯 달려가는 기나긴 도로처럼 리듬의 기복 없이 나긋하게 이어질 뿐인 그 연주곡들도 참 좋았다. 영화의 줄거리보다는 시청각적 요소 때문에 기억에 강하게 남은 작품이다.

영화 속에서도 몇 차례 언급되듯 사브 900 터보는 한마디로 ‘옛날 차’다. 관련 기사들을 검색해 읽으니 1987년형 순정 모델이라고 한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든 동시대 관객들의 일상에서든 실재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사건이다. 이 ‘무비 카’와 동년배인 국산 차량들을 살펴보면 기아자동차 ‘콩코드’, 대우자동차 ‘르망’, 현대자동차 ‘스텔라’ 등이다. 이처럼 40년 가까이 된 승용차들을 2020년대 거리에서 목격한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헐⋯” 할 것이다. 사브 900 터보를 우리 동네에서 봤을 때 딱 그랬다. 그런데 그때의 내 ‘헐’은 단지 신기한 감정을 드러내려던 의식적 육성이라기보다, 황홀감에 취한 나머지 입을 헤벌리고 있다가 침 대신 흘린 소리였다. 익숙했던 풍경이 ‘씬’으로, 늘 하던 산책은 ‘시퀀스’로, 그 속의 나라는 존재는 최소 ‘조연급’(내가 차주는 아니므로)으로 변모하는 느낌. 그야말로 영화적 체험이었다. 우연히 지나던 나조차도 이런데, 눈앞의 사브 900 터보를 자가용으로 데리고 다니는 ‘주인공’은 과연 어떤 기분일까.

수집가 수준은 아니지만 이따금 영화 굿즈를 사 모은다. 쓰지도 않는 성냥, 볼펜 한 자루보다 비싼 책갈피, 캐릭터 피규어 등등.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습관(⟨무간도⟩의 유덕화가 서류철을 허벅지에 탁탁 치면서 걷거나, ⟨아멜리에⟩의 오드레 토투가 극장 안에서 영화 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몰래 관찰하는 것 같은)을 따라 해 볼 때도 있다. 이 모든 행위들이 어쩌면 내가 내 삶에 시도하는 ‘셀프 낯설게하기(Defamilarization)’ 아닐까 싶다. 조금은 달라지라고, 아주 약간은 영화 같으라고, 아무도 안 알아주겠지만 엄연히 내가 이 삶의 주연이라고 주문 걸기. 사브 900 터보가 내 차는 아니지만, 그 차가 돌아다니는 이 동네는 내 동네다. 내 영화다. 아브라카다브라.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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