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더 자

[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18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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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돌이켜보니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는 동안 “그만 좀 자!”라든지 “어서 일어나!” 같은 꾸중을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주말에 세수도 안 하고 아침상 앞에 앉아 있으면 “뭘 벌써 일어났어? 들어가서 더 자.”라는 말이 들려왔다. 방학 때 거실 바닥에 누워 뒹굴거리다가 “찬 데 그러고 있지 말고 방에서 한숨 자.”라는 말에 까무룩 눈이 감기고는 했다. 깨어나면 배 위엔 이불이 덮여 있었고⋯. 유년기, 청소년기, 대학 시절, 직장 생활 내내 그랬다. 유치원, 학교, 회사에 다녀왔을 때나 등교⋅출근 안 하는 날엔 어김없이 자라는 말을 들었다. 부모님은 잠에 관대했다. 한때 유행이었던 ‘아침형(새벽형) 인간 되기’도 우리 집에서는 별 힘을 못 썼다. 잠 줄이면 건강 해친다는 지론이 불문의 가훈처럼 방방마다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 환경의 영향인지 나 또한 잠에 관대한 인간이 되었다. 타인의 늦잠이든 나 자신의 도둑잠이든 ‘뭐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정도로 여기는 편이다. 아침잠이 원체 많아 만날 지각하던 인턴 사원과 한 사무실을 쓸 때도 별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보편의 경제 활동이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거다. 그냥 그런 거다. 회사는 사칙에 따라 징계 조치를 내리고, 당사자는 받아들이면 될 일이다. 그런 걸 가지고 기어이 게으르네, 사회성이 없네, 인생 편한가 보네 같은 독설—게으르다는 평가야 그럴 수 있다 치지만, 타인의 사회성 유무와 인생사에 대해 본인이 뭘 안다고.—을 퍼붓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 본다. ‘아침 출근 저녁 퇴근’ 이외의 삶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세계관을 가진 인간 같아서다. 그런 인간들이 근무하고 경영하는 기업이라니. 잠이 몽땅 달아날 만큼 끔찍하다. 아무튼 그 인턴 사원은 경고 누적 끝에 결국 해고되었다. 이후 몇 차례 이직을 시도하다가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막연한 자유 의지로 선택한 게 아니라, 보통의 직장 생활에 도무지 적응하지 못한 임상 진단(?)을 바탕으로 합리적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밤새 일하고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취침하기. 이 일과를 그는 지금껏 십 년 가까이 지속해 오고 있다.

정작 내 부모님은 오전 다섯 시에 기상하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이다. 그런 분들이 자식한테는 허구한 날 자라, 더 자라 그런다. “우리는 우리고, 너는 너잖냐.” 내 귀엔 이렇게 들렸다.

단독 주택 앞마당 슬레이트 위에 늘어진 개 한 마리. 인기척에 머리만 들고는 끔뻑끔뻑 두리번거린다. “자, 더 자. 잠을 푹 자야 뭐든 할 수 있는 거여.” 언젠가 잠결에 들었던 목소리를 흉내내 본다. 기특하게도 개는 다시 쿨쿨, 자기만의 꿈나라를 지키러 간다.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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