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20
1972년 우리나라 정부는 ‘통일연수소’라는 기관을 발족했다. 남북 통일 문제를 학제적으로 연구⋅교육하며 전문 인력을 양성한다는 취지였다. 1986년 ‘통일연수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1991년에는 따로 청사도 지었다. 건물 안에는 일종의 상징물로서 독일 베를린 장벽 일부를 전시해 놓기도 했다. 1996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지금의 ‘국립통일교육원’으로 개칭했다. 소재지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4.19로 123(수유동). 우리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다. 국가적 중대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공공 기관이 내가 사는 지역에 있다는 점에 은근 자부심을 느낀다. 그렇기는 한데⋯ 내게는 나날의 동네 산책 코스로 더 친숙하다.
국립통일교육원 일대는 실제로 꽤 유명한 산책 구간이다. 교육원이 운영하는 견학 프로그램 이름부터가 ‘수유산책(水踰散策)’이다. 정문 방향으로는 북한산 둘레길 2코스 순례길—국립4.19민주묘지 전망대를 지나 심산 김창숙, 동암 서상일, 현곡 양일동, 성재 이시영, ‘헤이그 특사’ 이준 등 독립투사 묘역을 따라 걷는 길의 합류 구간이, 후문으로는 3코스 흰구름길—북한산 능선과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구름전망대로 이어지는 길이 펼쳐진다. 이러한 지리적 특색 덕에 건물 앞뒤로 온통 단풍이 물드는 만추 때는 교육원 언저리마다 도보객들이 모여든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다.
어느 날엔가는 얼룩무늬 고양이 한 마리랑 같이 걸었다. 정확히 표현하면 내가 그 고양이를 졸졸 따라다녔다. 웬 낯선 인간이 뒤를 한참이나 밟고 있었는데도 뭐 그러든가 말든가, 고양이는 느긋한 보폭으로 국립통일교육원 정문 앞을 지나 야무지게 제 행로를 이어 갔다. 그러고는 내가 잠깐 한눈판 사이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지인이 지난봄 작업실을 옮기면서 인스타그램에 이런 소회를 남겼다. “새로운 풍경 속에서 다시 천천히, 다르게 시작해보려 합니다.” 당사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쓴 글일 수도 있는데, 나한테는 ‘풍경’이라는 낱말이 와닿았다. 이사 또는 이직 후 흔히 하는 말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다’라는 표현이다. 내 지인은 ‘환경’ 대신 ‘풍경’을 넣은 셈이다. 하지만 ‘풍경에 적응하다’라는 문장은 영 어색하다. 그러니 ‘다시 천천히, 다르게 시작하다’라고 뒷말을 새로 쓴 것이리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새로운 풍경 속에서 시작하기. 실은 둘 다 같은 말이다. 애써 적응해야 하는 ‘환경’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다면 ‘풍경’이 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지인의 글을 읽으며 하게 되었다.
국립통일교육원 정문과 후문 주변을 걸으며 또 한 번 지인의 글을 떠올린다. 통일⋅대북 정책을 교육하는 국가 기관 청사의 엄숙한 ‘환경’ 앞뒤로, 걸으러 온 사람들과 고양이의 한갓진 ‘풍경’이 너누룩이 뻗어 나가고 있다. 온 힘을 다해 적응하고 버텨 내야 하는 생의 난코스 어딘가에도, 가을 세단풍처럼 기막힌 풍경이 한두 폭쯤 펼쳐져 있기를. 그 풍경으로 통하는 길을 나 스스로 찾고 수시로 드나들 수 있기를.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