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21
한가을 감홍난자(酣紅爛紫)에 취해 걷다가 훌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말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단풍잎 모아 오는 숙제가 있었다. 새 공책 한 권을 홍엽들로 채워—장장이 스카치테이프와 딱풀로 낱 잎을 한 장 한 장 붙였다.—담임 선생님께 제출하는 방식이었다. 사실상 교실 밖에서 애들 뛰어놀게 해 주는 일종의 야외 체험 프로그램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숙제라고, 우리 엄마 얘네 엄마 쟤네 아빠 인솔 하에 움직여야 했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만 주워라. 나뭇가지에 달린 건 함부로 떼면 안 돼.” 딱 고 정도의 지도 편달만 마친 후, 학부모들은 벤치에 앉아 하하호호 오랫동안 웃음꽃을 피웠다. 그러는 동안 같은 반 또는 한 동네 애들은 소풍날 보물찾기하듯 공원 여기저기 쏘다니며 낙엽을 주웠다. 다 모은 당일의 단풍잎을 플라스틱 용기에 조심히 넣고서는 고대로 고깃집에 갔던 날도 있었다. 알고 보니 신장개업한 돼지갈비 전문점이었다. 자식들 데리고 외출한 김에 어른들끼리 이심전심 깜짝 외식을 단행했던 것 같다. 정작 우리는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 줍느라 바빴는데, 엄마들과 아빠들은 송이송이 생화(生花) 다발을 만면에 머금고 있었다. 애들은 신났지, 날은 좋지, 고기 맛도 그만이지, 아주 어른들 얼굴의 함박꽃이 저녁까지 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맛있고 배부른 꽃구경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랑 모았던 홍엽들이 저 먼산의 단풍만큼 많았을까. 숙제를 해 가기만 해도 무조건 만점을 받았던 그 숱한 가을 노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때 낙엽만 줍지 말고 엄마들과 아빠들 얼굴도 좀 담아 놓을 걸. 젊고 말간 우리 부모님 꽃잎 몇 장도 몰래 떼서 밀폐 용기에 딱 넣어 둘 걸.
홀씨 날리듯 뿔뿔이 딴 동네로 흩어지긴 했어도, 대대손손 하하호호 저마다의 꽃을 피우느라 늘 바빴으면 좋겠다. 가끔씩 서로 꽃구경하러 왕래도 좀 하고, 제 웃음꽃 한 송이쯤 거저 내 주기도 하면서 한 계절 한 계절 무르익어 갔으면 좋겠다.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