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밀리미터

[평일의 의식의 흐름. 가을] #22

by 임재훈 N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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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10밀리미터 단위로 생산된 신발 같다. 내 정사이즈는 265밀리미터다. 260과 270 사이에서 고민한다. 5밀리미터를 줄이느냐 늘이느냐. 십여 년 직장 생활 내내 나는 260밀리미터짜리 시간을 신고 살았던 것 같다. 꽉 끼기는 해도 발이 안 들어갈 정도는 아닌, 신고 가만히 있으면 버틸 만하지만 걷거나 뛰는 순간 발가락과 뒤꿈치가 욱신거리는, 그런 착화감. 265밀리미터의 발을 260밀리미터의 시간이 감싼다. 발은 최대한 움츠리고 시간은 무리를 해서 몸을 불린다. 그렇게 억지스러운 변형으로 5밀리미터의 간극을 겨우 메운다. 수시로 야근하고 주말 근무를 하고 연차를 미처 다 못 쓰고 휴가 기간에도 업무 전화를 받던 그 신경질적인 나날을 다 합해 봐야 고작 5밀리미터인 것이다. 매일 족통(足痛)에 시달리면서도 그 신발을 벗을 엄두가 안 났다. ⟨날아라 슈퍼보드⟩의 ‘미스터 손’이 스스로 헬멧을 못 벗는 것처럼.

결국 회사가 나 대신 벗겨 주었다. ‘왜 남의 신발에 함부로 손대요? 왜 억지로 벗기려고 그래요?’ 차마 꺼내 보이지 못한 소심한 배알을 혼자 배배 꼬고 있던 중에 별안간 발바닥이 차가워졌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볼품없이 졸아든 맨살의 발 두 짝이 보였다. 어디 있어 신발, 도로 가져와 신발, 당장 다시 신겨 줘 신발, ⋯⋯. 한동안 ‘신발 신발’ 생떼를 쓰며 못난 맨발을 동동 굴렀다.

265밀리미터 정사이즈 신발을 찾아 신기까지 2년쯤 걸린 것 같다. 출퇴근 안 하는 평일은 설명서가 빠진 블록 완구 같아서, 나 혼자 뭘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 막막했다. 자잘한 조각부터 하나씩 맞추고 끼우면서 뭐라도 일단 완성해 보는 연습을 했다. 시답잖은 형태들을 올망졸망 내 일상에 쌓다 보니, 블록더미 저 밑에서 신발 한 켤레가 나왔다. 신어 보니 발에 딱 맞았다. 낯설기는 해도 그럭저럭 착화감이 괜찮았다.

새 신을 신고 가는 데라야 고작 동네 안팎이다. 삶을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감각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다만, 삶의 차원이 5밀리미터쯤 확장된 기분이다. 작은 통풍구가 생겼다. 바람이 통한다. ‘간판 뒤 은행나무’만 감각했던 시야각이 5밀리미터 벌어지니 ‘간판 옆 은행나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한다. 뒤에만 있는 줄 알았던 게 옆에도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린다. ‘뒤’와 ‘옆’의 분별이 바람결에 날아가자 ‘곁’만 남는다. 뒤든 옆이든 다 내 곁에 있는 것만 같다. 한참을 걸었는데도 발이 안 아프다.






사진수필 『평일의 의식의 흐름』(2025)

- 글과 사진. 임재훈

- 저자 소개. 포트폴리오 / 인스타그램


※ 『평일의 의식의 흐름』 브런치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편으로 분재됩니다. 각 계절당 25편의 글과 그보다 많은 사진들을 실을 계획입니다. 혹시 모를 무단 전재 및 배포 행위를 예방하고자 브런치북에는 원본 사진이 아닌 해상도(용량)를 줄이고 텍스타일 효과를 입힌 사본을 게재합니다. 추후 출간 작업이 진행되면 출판사와 원본 사진들을 공유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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