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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Jul 23. 2017

도망침으로 시작해 추락으로 끝맺는 전쟁영화라니

<덩케르크>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관람 후에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덩케르크(Dunkirk)>는 실화를 그린 작품입니다. 그 실화란 약 80년 전의 전시 상황이지요.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라 알려진 1940년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의 덩케르크 철수 작전을 영화화했습니다. ‘이것은 전쟁영화가 아니다’라는 선전 문구에도 불구하고 <덩케르크>는 어쨌거나 전쟁을 다룬 영화이므로 전쟁영화의 한 류로 묶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전쟁영화에 귀속되는 제법 낯선 하위 카테고리를 신설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세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1]부대 단위의 액션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병사(사병과 장교 등)와 민간인 개별의 내적 디테일만을 좇는다. [2]적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적이 보이지 않는다. [3]적진으로 진격하지 않는다, 홈(home)으로 귀환한다. <덩케르크>의 인물-배경-시간(흐름)은 이렇듯 일반적인 전쟁영화의 진법(陣法)을 크게 거스르고 있습니다.




ⓒ daum movie


영화는 병사들의 ‘도망침’으로 시작합니다. 전시 상황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만큼 무기력하게 적진 한가운데를 걷는 사병들, 별안간 시작되는 적들의 집중 사격(물론 적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윽고 아군 진영인 덩케르크 해안으로 내달리는 시퀀스. 오프닝에서부터 이미 영화는 향후 이야기 전개의 목적지가 ‘앞(전진/적군)’이 아닌 ‘뒤(후퇴/홈)’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이후 카메라가 포작하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면면은 크게 병사와 민간인 두 부류로 극명히 대조됩니다. 쌍안경으로 바다 저편을 응시하며 “여기서도 집이 보이는군”이라고 말하는 장교, 구조선만 보면 시종일관 “나도 좀 태워줘요”라고 외치거나 서로에게 “살려줘”, “이리로 올라와” 등의 소극적—이를테면 '군인정신'에 대단히 위배되는 듯한 대사를 내뱉는 병사들이 한쪽에 있습니다. 


이들이 향하는 방향은 오로지 한 군데, 홈입니다. 이들은 런닝타임 내내 거의 아무 것도 안 합니다. 즉, 전투를 하거나 전열을 가다듬는 따위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주로 가만히 앉아 있거나 서 있을 뿐이지요. 적기의 포격에도 이렇다 할 반격조차 하지 못 한 채 무력하게 고개를 숙이거나 포복하고 맙니다. 카메라는 이런 용맹하지 못한 병사들의 얼굴과 전신을 집요하게 담아냅니다. 이들의 반대 쪽에는 (적군이 아니라) 다이나모 작전 수행을 위해 징발된 민간 선박들과 그것을 운항하는 민간인들이 있습니다. 우직하게 덩케르크로 직진하는 자들이지요. 머잖아 병사들(의 시간)과 민간인들(의 시간)이 덩케르크에서 포개지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애초에 이 영화의 관심사는 아군 대 적군의 격전이 아니었음을 방증하듯, 적군의 얼굴은 끝내 현현하지 않습니다. 독일군들에게 포위됐다는 상황 설명에는 충실하나, 적의 얼굴은 계속 가려둔 채로 두는 겁니다. 공중전 때의 적기 정도가 그나마 구체적으로 드러난 적의 모습이지요. 전장을 비추는 카메라도 무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장이기보다는 폐허에 가까운 살풍경한 이미지가 이따금 하이앵글샷으로 스크린을 메울 따름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헥소 고지> 류의 피 튀기는 총격전이나, 살아 있는 인간의 신체에서 내장이 흘러나오는 고어한 장면도 당연히 부재합니다.(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전작인 <인셉션>, <다크 나이트 트릴로지> 같은 액션물을 통해서도 이미 증명된 바, 놀란 감독은 피가 당연히 나야 마땅할 폭력씬을 대단히 점잖게 연출하지요.)


전장은 물론이거니와 적진과 적군의 존재가 이처럼 오리무중식 묘사인 덕분에, 아군과 홈의 존재는 상대적으로 선명히 부각됩니다. 칙칙하고 무미건조한 이미지로 점철되던 덩케르크에, 징발된 민간 선박들이 속속 모여들던 장면을 떠올려보지요. 다양한 형태와 컬러를 지닌 어선, 요트, 소형 여객선 등은 마치 물감인 양 실로 오랜 시간 만에 스크린을 채색합니다. 한스 짐머의 음악 또한 이 같은 이미지의 리듬을 따릅니다. 징발선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스코어는 다이내믹한 선율의 조화 없이 한 음을 길게 지속시키거나 몇 가지 음을 반복적으로 고조시킴으로써 지루하고 처연한 덩케르크 해안 상황에 보조를 맞췄었지요. 그러다 다종다양한 수 척의 배들이 도착하자 퍽 풍부한 멜로디로 급변합니다. 런닝타임을 통틀어 아마 이 대목이 <덩케르크>가 최초로 서정미를 드러낸 시점일 것입니다.(스코어 앨범 중 8번 트랙인 6분 2초 분량의 ‘Home’이 바로 그 곡입니다. 4:00 지점이 지나면서 음악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됩니다.)


[1]부대 단위의 액션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병사(사병과 장교 등)와 민간인 개별의 내적 디테일만을 좇는다. [2]적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적이 보이지 않는다. [3]적진으로 진격하지 않는다, 홈(home)으로 귀환한다. <덩케르크>의 이 드라마틱한 세 꼭짓점을 카메라는 성실히 붙잡아 늘이면서, 극중의 잔교처럼 어떤 튼튼한 결(선)을 영화 전반에 걸쳐놓고는 결국 입체면으로 완결시킵니다.


요컨대 <덩케르크>의 카메라는 전적으로 아군 편입니다. 조국애, 군인정신, 살신성인 같은 지난 전쟁영화들의 가치와 철저히 거리 두기를 한 대신, 진득하게 아군의 얼굴과 몸과 목소리 곁에 카메라가 밀착된 모양새랄까요. 살려달라고 울부짖든, 집에 가고 싶다고 울먹이든, 또다시 덩케르크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소리치든, 심지어 자신을 구하러 온 민간인과 실랑이를 벌일 때조차, 카메라는 묵묵히 아군 편을 들어줍니다.(군인들에게 적잖이 상처 받았을 민간인들도 끝끝내 아군 편을 들어주지요.)


ⓒ daum movie


<덩케르크>의 압권은 영국군 스핏파이어(Spitfire)기가 글라이더 비행을 하는 장면입니다. 덩케르크 해안 부근에서 적기 두 대를 가까스로 격추시킨 뒤 연료가 바닥난 이 전투기는 프로펠러를 돌릴 추진력을 잃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추락하는 중인 것이지요. 장교급을 제외하고 영화 속 생존 병사들 중 (아마도) 유일하게 홈에 돌아가지 못한 인물이 바로 이 스핏파이어기를 몰던 공군입니다. 일몰하는 바다와, 홈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는 뭍의 작달막한 아군들과, 조종석 안의 무심한 큰 얼굴이 교차되는 동안, 추락은 명멸하는 해처럼 빛을 발합니다. 어쩌면 이자의 얼굴이, <덩케르크>의 카메라가 짓고 있었을 법한 표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육군과 해군은 사실상 덩케르크 전투에서 패해 낙향하는 셈이고, 공군은 무사귀환의 희망에서 미끄러져 적진과 인접한 해안가 어딘가로 착륙해버렸습니다. 말이 착륙이지 실은 '추락'에 더 가깝지요. 아군의 도망침으로 시작해 아군의 추락으로 끝을 맺는 전쟁영화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건 어찌 돼도 상관없다는 듯이, 카메라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아군 편을 들어줍니다. 실로 전적으로 아군 편인 카메라입니다.


땅과 바다와 하늘로 구성된 이 세계와 사회로부터 몇 번을 도망치고 추락하더라도, <덩케르크>의 카메라처럼 늘 우리 편이 돼줄 것이고, 내 편일 것인 무언가/누군가의 시선을 우리/나는 가지고 있었던가,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적어도 <덩케르크>라는 영화가 그 '무언가'에 해당하는 것이 돼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적으로 아군 편인 카메라의 방식, 이것이 이 영화가 설계되고 촬영된 방식이기 때문이니까요.(우리/나는 서로의, 혹은 각자 자신의 아군이 맞겠지요.) 역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미 완성된 한 편의 영화는 그 설계와 촬영 방식을 수정하는 법이 없지요. 철회 불가한 군사작전처럼 말입니다. 제법 든든한 발상 아니겠는지요.


이렇게 또 한 편의 ‘시네마 파라디소’는 전쟁영화의 프레임을 취하고 당신과 나 저마다의 전장으로 찾아와준 걸까, 하는 희망에 올라타고 극장에서 홈으로 살아 돌아왔습니다.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및 공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소셜 피플> (커뮤니케이션북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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