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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Sep 17. 2017

'Last' 액션 피규어

<라스트 액션 히어로>

부제: 액션 피규어 수집 행위에 대한 오마쥬



제 방에는 액션 피규어들이 있습니다. 여윳돈 있을 때마다 드문드문 사 모은 것들이 십여 개 됩니다. 이소룡, 배트맨, 터미네이터, 이티, 옵티머스 프라임, 다스베이더 등입니다. 주로 영화배우나 영화 속 캐릭터들이지요. 범인이라면 감히 대적 못할 악당들을 일당백으로 무찌르거나, 세계를 구하거나, 우주를 위협하거나, 외계에서 온, 그야말로 한가닥 하는 캐릭터들입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제게 이들은, 세상 단 하나뿐인 ‘히어로(또는 안티히어로)’들입니다. 


많은 제품들이 그러하듯, 액션 피규어 역시 고가일수록 그 완성도가 높습니다. 여기서 완성도란 ‘오리지널과의 유사성’ 수준이지요. 오리지널 캐릭터와 얼마만큼 유사한 형태로 축소화되었는가, 즉 제품화되었는가, 라는 것이 완성도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작용합니다. 천만 원대 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액션 피규어들은 감격스러울 정도의 완성도를 자랑하지요. 중소기업 샐러리맨으로서는 그저 입맛만 다실 뿐입니다. 


액션 피규어들은 대부분 손에 쥐어집니다. 180센티미터(6피트)가 넘는 라이프 사이즈(life size) 액션 피규어들도 있기는 합니다만, 손에 쥐어지지 않을 뿐이지 인력으로 운반은 가능하지요. 아무리 월등한 오리지널리티를 보여준다 한들, 그것들은 오리지널을 모방한 제품―이곳저곳으로 유통되어 판매되어야 할 물건입니다. 그런데 이 살아 움직이지 않는 물건에게서 구매자들은 생명력을 느낍니다. 액션 피규어 하나가 구매자의 공간에 추가되는 일은, 그 구매자가 해당 액션 피규어의 오리지널 소스(영화, 그래픽노블, 애니메이션 등)와 더불어 체험했던 자기만의 심동(心動)을, 유형하고 고정된 물성으로 눈앞에 붙잡아두는 사건입니다. 


동사적이었던 존재가 명사적인 사물로 고체화되었다는 점에서 ‘박제’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액션 피규어와 박제는 다르지요. 박제란 기본적으로 살아 있던 것을 살상하는 행위가 전제됩니다. 펄떡펄떡 박동하던 심장을 꺼뜨린 뒤(당연히 이 과정에서 ‘꺼뜨리는 자’의 공격성이 수반됩니다), 축 늘어진 사체를 다시금 일으켜세우고 부패를 방지하고자 일련의 ‘처리’를 합니다. 내장을 뽑아낸 빈 체내에 솜뭉치를 집어넣는다든지, 특수 약물을 사용한다든지 하는···. 이와 달리 액션 피규어는 생명의 확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담시라는 허구 세계에 존재하던 배트맨이라는 캐릭터(‘character’의 어원인 그리스어 ‘kharakter’는 ‘새겨진 것’, ‘조각된 것’으로서, 이미 그렇게 새겨지고 조각되어 있는 것, 즉 고정적―명사적 느낌입니다)가 ‘피규어(figure, 인물)’화되어 내 방 안에 놓일 때, 나는 그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의 움직임(고담시의 마천루 사이를 활공하거나 갱단을 섬멸하는 등)을 떠올립니다. 이 체험은 자연스럽게 ‘배트맨이 내 세계에 나와 함께 있다’라는 또 다른 심동으로 전이되지요. 이때 배트맨 액션 피규어는 단지 소유물이 아닌 엄연한 '존재'로서 내 현실세계(방 안)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액션 피규어는 이를테면 히어로의 화현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 방 안에 놓인―모셔진 그것들을 그냥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투시’합니다. 이런 까닭으로 액션 피규어 수집가들의 방 안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생령 충만한 성스러운 챔버(chamber)이자, 히어로의 세계로 입장하는 포털(portal)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현실의 관점에서 액션 피규어는 어쩔 수 없는 사물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나’ 말고는 이 액션 피규어를 생명으로 인정하는 이들이 없다는 것입니다.(방에 들어온 부모님이나 애인이 “이 잡동사니들 제발 좀 치워. 먼지 낀 것 좀 봐!”라고 지청구하는 사태가 왕왕 벌어지기도 하므로.) 


‘이 액션 피규어들이 정말로 살아 움직일 수 있다면···![부모님과 애인도 이 액션 피규어들의 실존적(?)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면···!]’ 수집―소유의 방식이 아니라, 실물―실존으로서 이 액션 피규어들과 뜨거운 모험을 함께하고 싶은, 타인들에게 나와 이 액션 피규어의 내밀한 관계를 규명/증명해 ‘보여주고’ 싶은 갈망. <라스트 액션 히어로>(존 맥티어넌 감독, 1993)는 이 갈망에 대한 영화적 해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작품의 드라마 구조는 간략히 보아 삼단입니다. (1) 주인공인 액션 영화 광 소년이 자신의 우상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신작 <잭 슬레이터 4> 속(스크린 저편)으로 들어감. (2)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연기한 캐릭터 잭 슬레이터가 소년의 현실세계(스크린 이편)로 들어옴. (3) 잭 슬레이터가 다시 자신의 허구세계(스크린 저편)로 들어감. 


현실세계―허구세계 사이의 이 드나들기를 구현해주는 장치는 황금색 극장티켓이지요. 말 그대로 골든티켓입니다. 극장티켓이 영수증 쪼가리 같은 형태로 바뀐 지 오래인 한국의 멀티플렉스 극장 문화를 안타까워 하는 관객이자, 단관 극장의 박스오피스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서 티켓을 손에 쥐고(내 손에 티켓을 쥐어준 창구 직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검표원에게 티켓을 보여주고(이번에도 역시, 내 티켓을 무사히 통과시켜준 데 대해 감사 인사를 하고) 어두운 극장 안으로 입장해봤던 한 사람으로서, <라스트 액션 히어로>의 골든티켓은 상징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티켓 한 장이 현실세계―허구세계 사이의 ‘여행’을 실현해준다는 극적 설정은, 관객들이 왜 영화를 보러 극장 안에 들어가는지를 실로 정확하게 표현해낸 것이지요. 


티켓을 ‘투시’하는 관객은 영화 속으로 ‘투과’하게 됩니다. 이른바 영화적 체험(cinematic experience)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티켓과 액션 피규어는 닮아 있습니다. 그것을 소유한 주체로 하여금 세계의 확장, 생명의 연장을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같은 투시―투과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허탈감마저 닮았습니다. 영화적 체험은 말 그대로 영화적일 뿐, 현실적 체험으로 전이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극단적인 예로,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관람한 관객이 극장 주차장에서 자신의 아담한 경차에 시동을 걸 때, 영화적 체험(각종 슈퍼카들의 우렁찬 엔진음이 들리는 듯한)과 현실적 허탈(그러나 내 차는 슈퍼카가 아니라는 각성)을 동시에 감응하는 경우를 들 수 있겠지요. 내게는 너무나도 귀중한 액션 피규어가 한갓 ‘먼지나 끼는 잡동사니’로 전락하는 사태를 수긍하고 감내해야 하는, 마법에 걸렸다/풀렸다를 반복하는 상황과도 유사합니다. 



이 답답함을 <라스트 액션 히어로>는 화끈하게 해갈하려듭니다. 영화 속 캐릭터를 산 채로 현실세계 안에 풀어놓은 것이지요. 잭 슬레이터가 주인공 소년의 집에서 엄마와 함께 모닝커피를 마시며 모차르트를 듣다니요! 영화적 주술로 액션 피규어가 소년의 곁에 화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현실세계의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허구세계의 잭 슬레이터를 마주하자 “이 스턴트맨, 나랑 정말 닮았군.”이라며 소년의 영화적 체험을 유일한 것이 아닌 복제된 것으로 격하시킵니다. 이뿐만이 아니지요. 허구세계 안에서는 총알도 피하던 잭 슬레이터가 현실세계에서는 맥을 못 춥니다. 여기는 ‘그의 세계’가 아니니까요. 


현실세계의 일원인 소년은 어느 순간부터 잭 슬레이터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나섭니다. “이건 영화가 아니라고요!”라고 주의를 주기까지 하지요. 이 대사는 허구와 현실의 공존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소년의 애처로운 외침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소년의 진정한 영화적 체험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즉, 소년이 현실세계의 자신을 ‘주연’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년은 ‘잭 슬레이터’라는 액션 피규어를 소유한 수동적 관객이 아니라, 자신의 히어로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능동적 주동인물(protagonist)로 성장합니다. 이윽고 ‘잭 슬레이터를 살리려면 그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한다’라는 행동 목표를 정하고 끝내 달성에 이릅니다. 


“나는 언제나 여기에 있을 거야.” 

잭 슬레이터는 이 말을 남기고 자신의 세계, <잭 슬레이터 4>라는 영화 속으로 돌아갑니다. 소년은 그와 포옹하며 눈물로 이별을 받아들이는데, 그 후에 또 한 번 내적 성숙을 이룹니다. <잭 슬레이터> 시리즈의 잭 슬레이터는 이제, 소년이 동경해마지 않던 우상이면서도, 소년이 ‘직접’ 살려서 돌려보낸 친구가 되었지요. 스크린 속 잭 슬레이터는 스크린 밖(극장)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소년을 향해 웃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렇습니다. 영화 속 히어로와 영화 밖 소년은 각자의 세계에 있으면서 서로를 잇는 마력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입니다. 굳이 잭 슬레이터를 현실세계로 끌어내지 않고도, 자신이 그의 세계로 틈입하지 않고도, 소년은 언제나 잭 슬레이터와 교감할 수 있는 관객으로 성숙한 것이지요. 언제나 여기에 있을 거라는 잭 슬레이터의 말을, 아마 소년도 똑같이 그에게 해줄 수 있을 겁니다. 둘은 각자의 세계의 ‘주연’이니까요. 

액션 피규어를 수집하는 이들 모두가 <라스트 액션 히어로> 속 소년일 리는 없을 겁니다. 단지 자신의 독특한 물욕을 충족시키고 과시하려는 용도로 액션 피규어들을 전시해놓는 부류도 있을 테니까요. 이런 수집가들의 진열장에 도열된 액션 피규어들은 사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겁니다. 아무런 마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왜냐하면 그들은 이별해본 적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세계에서 죽어가는 히어로를 살려내기 위해 울어본 적도 없을 것이며, 그 살려냄의 방법이 오직 이별밖에는 없음을 아프게 깨달아본 적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별 후에 비로소 ‘주연’이 된 자기 자신을 마주한 적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스트 액션 히어로>의 모든 소년과 같은 모든 소년들은···


   어느새 나이 들어어른이 되었고

   그동안 현실의 부대낌 속에서 얼마나 많은 히어로들과 이별을 하고 

   때로는 그 이별에 실패해 현실과 환상 사이를 위태롭게 헤매며 

   주변인들로부터 ‘특이한 녀석’ 소리를 들어야 했을는지. 


   ‘영화 같은 삶’이란 현실세계에서 구현 불가능함을 알게 되기까지 

   소년들은 얼마나 긴 시간을 히어로들에게 의탁해야 했을는지. 

   그럴수록 현실세계와 히어로들 간의 괴리감은 점차 벌어져만 가고, 

   히어로들은 그 힘을 잃어가고···. 


   그러나, 자기 안에서 죽어가는 히어로를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과 오기가 

   어느 순간 소년들을 자극했을 것이며, 그리하여 액션 피규어와의 교감을 시도하며 

   자신만의 마법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초라하게만 보였던 방 안에 그 마력이 서서히 모여들자 

   어른이 된 소년들은 더 이상 혼자 방 안에 머무는 걸 두려워 하지 않게 된 것이고

   이 성장에 인사를 보내듯 자칫 추억 속 ‘캐릭터’로 멈춰 있을 뻔했던 히어로들은 

   살아 숨 쉬는 ‘피규어’로서 부활하여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 것은 아닐는지. 


   고정되고 멈춰 있으려고만 하는 명사적 세계를 극복한 소년과 히어로 들. 

   자신만의 동사적 세계를 만드는 데 성공한 그들은 마침내 

   ‘last’라는 단어마저 동사로 읽을 수 있게 되고


   그렇게 현실세계의 ‘last’는 ‘마지막’을 넘어

   ‘계속된다’일 수 있는 마력적 가능성을 갖게 된 것이 아닐는지. 




글_나우어(NOWer)

   _회사에 다니며 영화 리뷰를 씁니다.

   _저작 및 공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소셜 피플>(12부작) (커뮤니케이션북스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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