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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Feb 03. 2018

K의 싸움을 위한 네 개의 대사

<블레이드 러너 2049>






- 이 글에는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전작인 <블레이드 러너>의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 K(라이언 고즐링 분)를 '싸우는 자'로 규정하며 이 리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K는 '나'와 '나의 것'을 위해 싸우는 자입니다. 싸움의 대상과 승패가 나야 싸움은 끝이 납니다. K의 경우라면 '내가 나로 서지 못하도록 막는 자'와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를 이겨야만, 또는 이 둘에게 져야만 그의 싸움은 일단락될 것입니다. 


그런데 K에게는 특정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싸움은 어떤 존재자와 대적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습니다. 그를 공격하는 자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K가 '나'로 서지 못하도록 막은 적이 없고, 'K'의 것을 빼앗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K는 싸움을 멈추지 못하고 이기건 지건 계속 나아갑니다. 싸움을 헤쳐 나가면 또 싸움이 있고, 이 싸움을 가로지르니 또 다른 싸움과 맞닥뜨리고, 이 싸움을 횡단했더니 더 큰 싸움이 도사리고 있는 형국. 적이 없는 싸움은 이렇듯 싸움 자체와 싸우게 돼버리는 모양새, 끝없이 싸워야만 할 것 같은 무한한 고통처럼 보입니다. 


K의 싸움—'나'와 '나의 것'을 위한 싸움에 적이 없는 까닭은 자명합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나'여본 적이 없었던, '나'가 애초에 없었던 리플리컨트(replicant)이기 때문입니다. K는 '나'가 아니므로, 그가 '나'로 서지 못하도록 막는 적이 존재하기란 불가능하며 그에게 '나의 것'이라는 표현은 오류입니다. 


그럼에도 K의 싸움은 어떻게 이 영화 안에서 성립되고 있는가. 

영화 속 네 가지 대사를 좇으며 이 질문에 대한 답에 가 닿아보려 함이 이 리뷰를 시작하는 목적입니다. 



LITTLE 'K' FIGHTING FOR WHAT'S HIS


K는 로스앤젤레스 경찰국(LAPD)에서 '블레이드 러너'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공무집행요원입니다. 폐기 처분 대상인 구형 리플리컨트—제품들을 추적하여 당국으로 회수해 오거나, 때에 따라서는 검거 현장에서 즉결 폐기 처분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K 또한 리플리컨트—제품입니다. 일련번호(제조번호, 출고번호) KD6-3.7을 매번 다 발음하기란 번거로운 일이니, 인간들은 앞자리 알파벳 한 자만을 발음하기로 합니다. 종종 'Officer K'라고 직함을 붙여 부르기도 합니다.


경찰국장(로빈 라이트 분)이 K의 집에서 위스키를 마시던 장면을 떠올려보죠. 뭐든 좋으니 기억 하나만 얘기해보라는 국장의 말에, K는 제조 과정에서 주입된 기억(an implanted memory)을 낭독하듯 들려줍니다. 어린 시절 제 장난감을 빼앗으려는 아이들에게 쫓겨 다니고, 궁지에 몰리자 장난감을 은밀한 곳에 숨기고는 결국 패거리들로부터 구타를 당한다는 내용. 다 듣고 난 뒤 국장이 흡족해 하며 이렇게 요약합니다. 


"자기 것을 위해 싸우는 어린 K"

[Little K fighting for what's his]


이 대사로부터 지금 이 리뷰가 촉발되었습니다. 이 리뷰가 짚으려는 몇 가지 키워드들—'자기 것(나의 것)', '싸움', '(어린) K'—이 이 대사 안에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운데 '자기 것'과 '싸움'은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언급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어린) K'만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  ⓒ IMDB.com


먼저, 'K'라는 용어는 일련번호 KD6-3.7 제품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입니다. K는 인간이 아니므로 'K'라는 용어를 '인칭 대명사'로 표현한다면 오류일 것입니다. '제품명' 정도가 적절할 듯하지만, 이마저도 썩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K라는 제품은 일련번호만을 부여받았을 뿐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애플이나 삼성전자 같은 제조사들이 출시한 스마트폰들에는 국제모바일기기 식별코드(IMEI)가 매겨집니다. 같은 갤럭시노트 8 기종이라도 각 제품마다 IMEI는 다르죠. 하지만 일반적으로 IMEI가 제품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기능하지는 않습니다. 소비자든 판매자든 그냥 '갤럭시노트 8'이라고 통칭하죠. '갤럭시노트 8'은 갤럭시노트 8 기종의 '이름'인 셈입니다. 갤럭시노트 8 기종인 수많은 제품들 각각의 개별성(현미경으로 관찰해야만 확인이 가능한 외관의 스크래치 여부, 소재 표면의 미세한 결의 형태 차이, 특수 장치로만 측정할 수 있는 통화 감도의 편차 등)은 '갤럭시노트 8'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것이죠. 어쨌거나 영화 속 KD6-3.7 제품에는 '갤럭시노트 8'에 해당하는 이름이 없습니다. 중반부 이후부터는 '조(Jo)'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 '조'는 K라는 개별자만을 위해 지어진 단독 명사는 아니(었음이 후반부에 밝혀지)죠. 


한마디로 K는 이름 없는 사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 없음으로 인하여, K가 단순한 '사물—보편자'가 아닌 특수한 '존재—개별자'로 정위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K가 이름 대신 (리플리컨트—제품 각각에 매겨진) 일련번호로 불리는 모습은,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쓴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K는 (인간이 아닌) 제품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의 중요한 대사이기도 한 'more human than human'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싸움, 즉 '나'로 거듭나기 위한 싸움을 벌일 특별한(단독한) 개별자라는 메시지를 마치 비밀 코드처럼 이야기 안에 심어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일련번호로써 획득되는 리플리컨트—제품 K의 개별성을 음미해본다면, 국장의 위 대사 중 'little K'라는 호칭은 묘한 어감으로 다가옵니다. 남자 성인의 형태로 제조된 K에게 'little'이라는 형용사는 오류입니다. 그러나 향후 'more human than human'의 기치를 온몸으로 수행하게 되는 K의 액션, '나—되기'의 싸움을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성숙, 제품(기계)스러움에서 인간스러움으로 도약하게 되는 자율적/자발적 행보를 고려해본다면, 'little K'는 '(아직은) 미숙한 K' 정도로 의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곧 'big K'가 될테니까요. 



WE DON'T RUN


<블레이드 러너 2049>에는 두 곳의 리플리컨트 제조사가 등장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사 중 기업명으로만 언급되는 '타이렐(Tyrell Corp)', 빛과 물의 사원 같은 기묘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월레스(Wallace Corp)'입니다. 


타이렐은 파산한 기업입니다. 이 회사에서 출시한 리플리컨트—제품들의 치명적인 결함이 타이렐을 몰락하게 했죠. 그 결함이란, 다름 아닌 '너무 인간적'이라는 점입니다.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를 떠올려보겠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넥서스 6' 제품라인에 속하는 리플리컨트들은 모두 '이름'으로 불리죠. 로이(룻거 하우어 분), 프리스(대릴 한나 분), 조라(조애나 캐시디 분), 레온(브라이언 제임스 분), 레이첼(숀 영 분). 이들은 또한 인간에게 저항하고, 인간을 공격하고, 인간으로부터 도망가기도 합니다.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즉 '나'라는 주체개념이 입력된 채로 생산된 제품들인 것입니다. 


극중 프리스는 심지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발화하기도 합니다. 데카르트적으로 표현한다면 <블레이드 러너>의 리플리컨트들은 코기토(Cogito), 즉 '생각하는 나', '의심하는 나'를 인식하는 존재—개별자들이었던 것이죠. 세상에 대한 별 의심도 사유도 없이 무심코 살아가는 인간 군상과 비교한다면, 넥서스 6 제품들은 훨씬 성숙하고 진보된 무리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을 창조한 인간, 자신이 창조된 현실세계를 사유하고 의심할 수 있었던, 타이렐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이기도 했던 'more human than human'을 완벽히 구현했던 혁신적 제품들이었던 셈이죠. '4년 수명'이라는 제약 조건이 없었다면, 넥서스 6 제품들은 인간들을 전복시켰을 것입니다.(혹은 훌륭한 철학자가 되어 인간들을 계몽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프리스  ⓒ IMDB.com


이렇듯 지나치게 인간적인,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결함'은 자연스레 (인간의 그것과 유사하거나 더 극심한) 폭력성으로 이어지고, 결국 리플리컨트 제조 금지령이 시행되기에 이르면서 타이렐은 파산을 맞습니다. 시간이 좀 흘러 월레스가 기존 넥서스 6의 결함을 보완한 신제품을 선보이면서 리플리컨트 제조는 다시 합법화되죠. 월레스가 내건 기치는 'less human than human'이라 할 수 있습니다. 


'more human than human'이라는 결함은 어떻게 'less human than human'으로 보완되었는가. <블레이드 러너 2049> 초반부 K와 사퍼(데이브 바티스타 분)의 대사를 통해 설명됩니다. 신모델 K가 구모델 사퍼(역시 구모델이라 '이름'이 있습니다.)를 폐기 처분하러 온 상황인데, "너희 신모델들은 인간들 뒤치다꺼리를 잘도 해주는군."이라는 사퍼의 비아냥에 K가 이렇게 대꾸하죠. 


"난 내 기종을 폐기 처분하지는 않아. 우리는 도망가지를 않으니까."

[I don't retire my own kind because we don't run]


도망가지 않는, 저항하지 않는, 얌전히 회수됨을 받아들이는, 블레이드 러너들이 즉결 폐기 처분을 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리플리컨트—제품을 월레스는 생산해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노예형 리플리컨트—제품인 것이죠. 


프로그램화된 노예 근성에 오류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지속적인 검사도 이루어집니다. '기준선 테스트(baseline test)'라는 것이죠. 깊이 고민하고 사유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이 연속적으로 던져지지만, 리플리컨트는 이 질문들에 대하여 고민하거나 사유를 하면 안 됩니다. 인간들에 의해 코드화된, 질문과 전혀 무관한 엉뚱한 대답을 즉각 내뱉어야만 기준선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습니다.(통과 못하면 당연히 '리콜'됩니다. '결함' 있는 제품이므로.) 인간은 리플리컨트에게 이런 기준선 테스트를 거듭하면서 노예의 '주인—되기 가능성', 'more human than human' 실현을 충실히 제거합니다. 


질문: 아이를 두 팔로 안으면 어떤 기분인가? [What's it like to hold your child in your arms?]

답: 연결돼 있음 [Interlinked]

질문: 연인을 위해 선물을 샀나? [Did you buy a present for the person you love?] 

답: 감옥 안에 연결돼 있음 [Within cells interlinked]

질문: 당신이 못 들어오도록 누군가가 방을 잠가놓은 적이 있나 [Has anyone ever locked you out of a room?] 

답: 안에 [Within]


왠지 이 기준선 테스트는 영화 밖 현실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일상과도 닮아 보입니다. 출근과 퇴근이라는 정해진 타임라인 안에서, 직장인은 자기 직장의 인적자원(human resource)으로서 결함 없이 기능해야 합니다. 사무실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나'라는 것은, 사무적으로 또는 직급에 따라 마땅히 해야 할 말과 행동이라는 기준선에 제약된 '나'일 수밖에 없죠.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사퍼  ⓒ IMDB.com


기준선 테스트에 통과한 K는 "한결같은 K"라는 칭찬을 듣고 보너스까지 지급받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제 경우를 예로 들면, 저 또한 사무실에서 "참 한결같아서 좋아요."라는 말을 몇 번인가 들어봤습니다. 매번 "감사합니다."라고 답했었는데,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를 지켜보고 있자니 그리 감사할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도 들더군요. 나는 그저, 누군가에 의해 세팅된 '기준'을 잘 따른 것에 불과하지 않았나, '나'로서 말하고 행동한 적은 없었던 것 아닌가, 그렇다고는 해도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니고 원래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매일매일의 기준선 테스트를 잘 통과하는 일 아니겠나, ··· 뭐,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더군요. 


어쨌든, 넥서스 6 제품들처럼 저항하거나 도망가는 코기토가 되기란 K에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초반부터 퍽 명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모델'인 K가 '구모델'보다 미숙한 존재로 그려지는 점 또한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또다시 제 사례에 대입해보자면, 연봉도 높아지고 경력도 쌓였으나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의 패기와 꿈 같은 주체 개념은 상당히 퇴화된 것과 비슷한. 



A NEW MODEL / A CHILD


월레스사의 창업주 월레스(자레드 레토 분)는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확실히 신의 지위를 욕망하는 캐릭터로 묘사됩니다. 타이렐사를 설립한 타이렐 역시 <블레이드 러너>에서 신격화된 이미지로 그려졌는데[리플리컨트 로이는 타이렐을 '아버지' 혹은 '조물주(maker)라 부르죠], 월레스는 그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데오스(theos)이고 싶음을 강론합니다. 그 한 예로, 월레스는 자사 제품들을 '천사'라 칭하죠. 중세 기독교 사회의 위계적(hierarchical) 세계관과도 닿아 있습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신이 있고, 그 밑에 아홉 단계로 계급화된 천사들이 존재하며, 바닥에는 인간들이 놓이는 구조 말입니다. 따라서 월레스가 리플리컨트들을 천사라 부를 때 이 호칭에 전제된 바는, 그의 세계관 안에서 인간이 리플리컨트들보다 하층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월레스에게 인간은 왜 리플리컨트들보다 못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아마도, 월레스는 '내가 창조한 것 / 내가 창조하지 않은 것'으로 이분하여 세계를 인식하는 캐릭터이므로,'내가 창조하지 않은 것'인 인간을 리플리컨트의 아래에 위치시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미있게도 월레스의 이러한 세계관 탓에 월레스 자신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창조하지 않은 것'이 있는 유한자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죠. 또한, 자사 제품들에 출산(procreation) 기능을 탑재하고자 애쓰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모습도 그의 유한자적 한계를 드러냅니다.(출산 기능 탑재에는 성공했지만 자신이 창조한 리플리컨트 로이에게 살해당하는 타이렐의 경우, 월레스와는 다른 차원의 유한자적 한계를 지니는 셈입니다. 타이렐은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하나님—아버지'의 지위에는 닿지 못한 채 그저 '아버지'로서 제 피조물에게 시해되는 존재일 뿐이니까요.) 


<블레이드 러너>의 타이렐  ⓒ IMDB.com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월레스  ⓒ IMDB.com


월레스는 기독교의 신보다는 플라톤의 제작자(데미우르고스) 이미지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한 우주 발생론은 세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하는데, 제작자, 설계도, 질료(재료)가 그것들입니다.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부재하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능한 제작자라도 설계도와 질료 없이는 아무 것도 제작해내지 못하죠.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예로 들어보면, 월레스가 바로 제작자, '인간 자체'라는 이데아가 설계도, 인간의 육체와 유사한 형태의 골격과 피부 등을 제조하는 기술력이 질료인 셈입니다. 플라톤의 제작자와 달리 기독교의 신은 무로부터 유를 창조해낼 수 있는 무한자입니다. '있으라' 하는 순간 그냥(제작 과정 없이) 있게 되죠. 


요컨대 월레스는 '제작자'를 극복하고 '신'이 되려는 욕망을 지닌 캐릭터입니다. 이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출산 기능이죠. 월레스사의 리플리컨트들이 열성적으로 번식을 할 수만 있다면, 월레스는 더 이상 제작자로서 '제작'을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있으라' 하면, 리플리컨트들이 '있게 되는' 세계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영화 속 월레스의 대사처럼 온 우주를 소유할 수 있겠죠. 

그런데 월레스의 이러한 초월적 욕망은 영화 초반부터 멋쩍게 폄하됩니다. 그것도, 그가 늘 곁에 두는(특별히 이름까지 하사한) 리플리컨트 러브(실비아 힉스 분)에 의해서 말입니다. 새 리플리컨트—제품의 제조 완료 보고를 할 때 저지른 말실수가 화근입니다. 러브가 리플리컨트를 칭하며 사용한 단어는 'a new model'이었는데, 이 실언(?)이 월레스를 살짝 짜증나게 한 것이죠.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라는 말 정도는 할 줄 알겠지?"

[Can you at least pronounce, 'a child is born'?]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러브  ⓒ IMDB.com


'a child is born'이라는 명제는 <블레이드 러너 2049>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핵사건이기도 하죠. 'a child is born'을 발화조차 못하는 러브 같은 리플리컨트들의 반대편에, 'a child is born'을 말할 줄 알 뿐 아니라 직간접적으로 경험까지 한 사퍼나 K 같은 리플리컨트들이 있습니다. 앞 챕터에서 언급했던 기준선 테스트가 '노예적 한결같음'을 검사한 것이었다면, 월레스의 질문은 '주체적 대중없음'을 확인하는 지표로 작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 앞에서 러브는 죄스러운 낯빛으로 멀뚱히 서 있을 뿐입니다. 주인(인간)이 불쾌함을 표했으니 노예는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이 당연하죠. 


러브의 인간 복종 태도는 참 한결같이 노예적입니다. 주인의 메시지에 토를 달지 않는 우수 제품이죠. 러브와 비교하면 K는 불량품입니다. 그의 행동과 판단은 인간 입장에서 볼 때 몹시 대중없고 예측 불가능합니다. 타이렐사의 리플리컨트가 출산을 했었다는 모든 증거들을, '출산된' 리플리컨트까지 모조리 제거하라는 LAPD 국장의 지시에 K는 이런 대꾸도 할 줄 압니다. "태어난 것들에는 영혼이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이죠. 월레스의 위 대사를 만약 K가 들었다면 러브처럼 잠자코 있지만은 않았을 듯합니다. 



WE ARE OUR OWN MASTERS


주인—제작자가 세팅해놓은 '기준'을 한결같이 맞춰왔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느 정도 예측 불가능한, 즉 기준에서 어긋나는 대중없는 말과 행동을 할 줄 알았던, 그러나 아직은 미숙했던, 이런 불량품 K는 어떻게 '나'와 '나의 것'을 위해 싸우는 자로 성장하는가. 애초에 '나'가 아닌 '제품'이었으므로 '나의 것'이라는 표현 자체가 오류인, 이런 K의 이 불량한 싸움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이제 이 질문들에 대한 답에 바짝 다가온 것 같습니다. 


앞서 살펴본 세 개의 대사들을 간략히 종합해보면서 K라는 캐릭터의 윤곽을 다시 한 번 그려보도록 하죠. "I don't retire my own kind because we don't run"이라고 말하는 순간의 K는 스스로 주인—제작자, 즉 인간의 노예임을 시인한 셈입니다. 도망가지 않는다(저항하지 않는다)라는 선언의 동의어는 '싸우지 않겠다'입니다. 주인에게 대들지 않는 충직한 노예죠. 이랬던 K가 인간으로부터 "little K fighting for what's his"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 대사가 발화된 지점으로부터 K의 불량기 혹은 반항기는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과연 K는 요주의 리플리컨트로서 LAPD 뱃지와 총을 압수당하기에 이르고, 기어이 '싸우는 존재'로 도발합니다. 이 격변의 계기가 바로 'a child is born'이라는 명제에 대한 경험이죠. 리플리컨트가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인 줄만 알았던) 출산을 했었다는 증거 정황을 우연히 발견하고, 이와 관련한 심층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 속에서 'a child'와 'born'을 직접 목격해버린 것입니다. 앞 챕터에서 다룬 월레스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K는 'a child is born'을 말할 수 있는 존재이자 심지어 이것을 체험하기까지 한 아주 특별한 리플리컨트라 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대사들을 사탕처럼 입 안에 넣고 굴리다 보니, 세 가지 대사들이 녹아 나온 단물 같은 질문 하나가 입천장과 혀끝을 자극합니다. 「'a child is born'에 대한 경험이 왜 K에게 격변을 일으킬 수 있었는가?」 아마도 이 질문이 K의 불량한 싸움의 성립 조건을 속 시원히 설명하는 답이 되어줄 듯합니다. 


<블레이드 러너>와 마찬가지로 <블레이드 러너 2049> 역시 '기억'에 관하여 깊이 고찰하고 있죠. 전작은 리플리컨트 레이첼을 통해 '주입된 기억'이라는 소재를 부각했습니다. 레이첼은 스스로 인간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캐릭터죠. '내 것'인 줄 알았던 기억이 타이렐에 의해 임플란트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이 혼란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레이첼은 (인간들처럼) 데커드와 키스를 하고 사랑을 나누기까지 하죠. 또한, 블레이드 러너들의 추적을 피해 데커드와 도망가기도(저항하기도) 합니다. '가짜 기억'이든 '진짜 기억'이든 기억 자체가 레이첼의 'more human than human' 실현을 제약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던 겁니다. '기억'이 '존재—되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태도가 <블레이드 러너> 이야기에는 전제돼 있었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와 레이첼  ⓒ IMDB.com


<블레이드 러너 2049>는 '기억'이라는 소재를 '존재—되기' 문제와 강력하게 결속시킴으로써 전작과 차별화된 노선을 택합니다. 이 영화의 중핵사건이자 핵심 키워드인 'a child is born'은 이야기 안에서 '기억'이라는 개념과 짝으로 작동하죠. 리플리컨트가 출산을 했을 때, 이 태어난 아이(a born child)는 인간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기억'도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즉, 기억이 임플란트 되어 있지 않은 말끔한 상태인 것이죠. 이 아이는 앞으로 자신만의 기억을 갖게 될 것이며, 그 기억들의 총합인 '나'로 성장할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리플리컨트의 이런 대사도 나오는 것이겠죠. 


"그 아기는 우리가 노예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지. 

 우리 중 하나라도 아기를 낳을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인 거야."

[I knew that baby meant we are more than just slaves. 

 If a baby can come from one of us, we are our own masters.]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  ⓒ IMDB.com


노예(slave)와 주인(master)이라는 단어가 노골적으로 대비를 이룹니다. '나'의 '기억'을 가질 수 있음이야말로 리플리컨트들이 노예에서 주인 되는 조건이라는 것을 이 대사는 선포하고 있죠. 이 선포의 내용이야말로 'a child is born'이라는 명제가 내포하는 바입니다. 


K는 이 대사가 가리키는 '아기'를 직접 만납니다. 성장한 이 '아기'는 리플리컨트—제품들에 임플란트 될 '기억'을 제작하는 일에 종사 중이며, 자신을 '예술가(artist)'라고 칭하기까지 합니다. 일개 노예에 불과할 뿐인 줄로만 알았던 리플리컨트가, 이렇듯 '기억'을 빚어내는 예술가—창조자(creator)가 돼 있다니! 


'기준선'을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기준선' 자체를 완벽히 파괴시켜버린 이 생생한 증거를 K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해버린 것입니다. 이렇듯 'a child is born'을 체험한 사건은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와 맞먹는 강도로 K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K가 '나'라는 주어를 대오하는 순간입니다. 이 격변을 기점으로 K의 '나'와 '나의 것'을 위한 싸움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이죠. 이 싸움이 바로, K가 '나'로서 갖게 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입니다. 이 단 하나의 기억으로써 K는 수많은 리플리컨트—제품들 중 하나에서, 단독한 '나'로 완성됩니다. 달리 말해, 그는 스스로 '나(의 기억)'를 창조해낸 것이죠. 



나는 어떻게 싸워야 하나


직장 생활을 해 오면서 좀 지겹다 싶을 만큼 반복적으로 들었고, 나 자신조차 누군가에게 '참 지겹겠다' 우려하면서도 거듭 말했던 용어가 있습니다. '창의적'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를 우리말로 독음한 '크리에이티브'라는 말로도 자주 바꿔 썼고요.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듣고 쓰는 나란 사람은 과연 '크리에이터'일까, 하는 번뇌(?)가 늘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따금 시건방져져서는 '나' 대신 감히 '우리'의 문제로 확대하기도 했습니다. 너도 나도 '크리에이터'를 자처하는데, 정말로 우리는 '크리에이터'가 맞느냐는 반발이었죠.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에게 강력한 감정 이입을 해버린 탓에, 어쩌면 이 영화의 이야기를 엉뚱하게 받아들여버린 것일지도 모르겠어서 남기는 변명입니다. 영화를 풀이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라는 사람의 골풀이가 아닌가 싶어 소심해지기도 합니다. 


이 리뷰를 써봄으로써 캐내고자 했던 답, K의 '나'와 '나의 것'을 위한 싸움은 어떻게 성립되는가에 대한 답은 도식적으로나마, 억지스럽게라도 도출한 것 같습니다. 답을 구하고 나니, 이젠 K에게서 이 글을 쓴 '나'에게로 커다란 질문이 엄습해 옵니다. '나는 어떻게 싸워야 하나'라는. 


제 경우는 직무 성격상 꽤 자주 '작가'라 불리는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뷰 기사를 쓰는 일들을 몇 년간 해왔습니다. 작가들을 만나고 사무실로 복귀할 때마다 매번 혼란스러웠습니다. 특히, 저와 비슷한 연령대인 분들을 인터뷰한 날은 혼란의 강도가 좀 더 심했죠. 이 혼란의 정체는 피상적으로는 '회사를 안 다니고도 경제적으로 이럭저럭 잘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한 데 대한 충격(보다는 부러움)이고, 깊이 들어가면 '저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만들고 있는데, 나는?'이라는 무거운 자문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으며 살기'가 왠지 누군가(대체 누군지 알 수 없는 누군가)에 의해 세팅된 기준선처럼 느껴져버린 건, '작가'들을 인터뷰하면서부터였던 듯합니다. 월급도, 4대보험도, 노후 대책도, 심지어는 적금조차 없는 그들은 왜 하나같이 "아우,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은 하면서 활짝 웃고 있었던가. 왜 나에게 그들 한 명 한 명은 '행복한 인간'으로 인식되었던가. 직장생활과 월급이라는 기준선 테스트를 다달이 통과해온 '한결같은' 나보다, 가난하고 불안정한 그 작가들은 왜 '자유로운 개별자'로서 마음껏 그들 자신의 것(작품)에 대하여 몇 시간이고 말할 수 있었던가. 나에게 '나의 것'이라 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  ⓒ IMDB.com


<블레이드 러너 2049>의 K도 어쩌면 구모델 리플리컨트—제품들을 만나면서, 'a child is born'과 'more human than human'이라는 명제들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그들의 '창조'를 목격하면서, 이 리뷰를 쓰고 있는 나와 유사한 형태의 혼란에 빠졌던 것이 아닐까. K는 용감히 '나'와 '나의 것'을 위해 싸우기로 선택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싸워야 하나. 질문들은 멈추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뜯고 씹어 먹고 있습니다. 


대학생 때 무심히 읽었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1부 중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에 그토록 의문형 문장들이 많았던 까닭을 이제는 공감하게 되는, 참으로 복잡하고 소심한 일개 회사원의 <블레이드 러너 2049> 리뷰는 이 정도로 마치겠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기도 한, 그 슬픔의 길을 가려는가? (···) 그대는 새로운 힘이며 새로운 권리인가? 최초의 움직임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가는 수레바퀴인가? 그대는 또한 별들을 강요하여 그대 주위로 돌게 할 수 있는가?"

_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판) 제1부 「창조하는 자의 길에 대하여」 중 




글_나우어(NOWer)

   _글 쓰는 일을 합니다

   _저작 및 공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소셜 피플>(12부작) (커뮤니케이션북스 출판사)

      <소셜 피플>(12부작) 카카오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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