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플레이어 원>
이 글에는 영화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안 읽으셔도 상관없는
동네마다 오락실 한두 곳쯤은 기본으로 있고, 문구점 앞 미니 아케이드 게임기가 꼬맹이들의 하굣길 해찰을 부추기던 1990년대 초반. 저는 초등학생(국민학생)이었습니다. 바지 주머니 안에다 늘 백 원짜리 동전들을 한 뭉텅이씩 넣고서는 오락실과 문구점을 쏘다니며 놀았습니다. ‘백 원으로 끝판 깨는’ 게임을 두 종목쯤 보유하고 있어서(‘파이널 파이트’와 ‘캐딜락 앤드 다이너소어’), 오락 좀 하는 애들한테 퍽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의 경우, 슈퍼패미콤이나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의 등장 이후 오락실 가는 애들이 확실히 줄었습니다. 하지만 ‘오락실 문화’가 사라지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게임기 샀다는 친구네 집으로 우르르 놀러 가서 ‘우리만의 오락실’처럼 소리 지르고 낄낄대며 놀았습니다. 우리는 늘 학교 끝나면 ‘쟤네 집 가자!’, ‘너네 집 가도 돼?’ 하며 우발적으로 한 집에 들이닥치곤 했습니다. 친구네 부모님께 상당한 실례였을 텐데, 한 번도 혼나지 않았습니다. 간식을 거하게 먹은 적은 있어도 야단 맞은 적은 없습니다.(물론, 우리가 돌아간 뒤 친구 놈은 두들겨맞았을지도···.)
제가 기억하고 정의하는 오락실 문화란, 이렇게 애들끼리 우발적으로 모여서 몸 부대끼며 왁자지껄 우르르 까르르 오락하는 것입니다. 심부름 다녀오는 길에 친구랑 마주치면 ‘야, 동전 있으면 오락실 한 판?’ 이러고는 딴길 새기도 일쑤였죠. 매일매일이 그야말로 우발적 오락 행위의 연속이었던 듯합니다.(이런 저를 쫓아내지 않은 제 부모님과 친구네 부모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 시절 오락과 오락기로 가능한 팀플레이 규모라는 게 끽해야 두 명(2인용)입니다. 이때 팀플레이 규모란, 실시간 동시 플레이가 가능한 인원 수를 가리킵니다. 저희 집도 드디어(!) 슈퍼패미콤 보유 가정으로 등극했을 때, 팩을 다량으로 소장하고 있던 친구 놈한테 전화를 걸어서 “내일 학교 끝나고 우리 집으로 다 모일 건데, 넌 2인용 되는 팩들만 좀 신발주머니에 넣어가지고 와라, 너네 엄마한테 걸리지 마라” 하는 급보를 전하기도 했죠.
다섯이 모이면, 둘이 2인용 플레이를 하는 동안 나머지 셋은 자기 플레이 차례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플레이 우선권 선정 방식은 간단했습니다. 집에 들어가 신발 벗자마자 제일 먼저 두 개의 조이패드를 움켜쥐는 놈 둘이 플레이 우선권을 따낸 뒤 나머지 애들끼리 가위바위보로 다음 순번을 정하는 식이었죠. 몸싸움과 달리기는 필수, 집 주인이 손님한테 양보하는 어른스러운(?) 예의범절 따위는 애들답게 그냥 무시, 조이패드 못 잡았다고 다른 애 플레이하는데 심술 부리기 금지, 파행(간지럽히기, 귀에다 입 대고 바람 불거나 소리 지르기, 텔레비전 화면 가리기 등) 엄벌 조치.
차례 바꾸는 방식도 깔끔했습니다. ‘(게임 속 플레이어가) 죽으면 딴 애한테 조이패드 넘기기’. 즉, 죽을 때까지 계속 플레이하기. 그렇다 보니 네다섯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조이패드를 잡지 못한 녀석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심술이 났는데 심술은 못 부리니 그냥 집에 가버리거나 혼자 코 골며 자는 놈들이 속출했지만, 다음번에 모이면 늘 걔네들한테 플레이 우선권을 줬던지라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지냈습니다.
요컨대, 오락실 세대(라는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인 제가 경험했던 오락실 문화란 대체로 이런 정서들입니다. 친구 놈들과 우르르 와르르 낄낄거리기(아빠엄마한테 잡혀 사는 우리 반 1등 놈이 오락할 때만큼은 꼴찌여도 신나가지고 허리 꺾고 웃어댐), 행여 한 놈이라도 토라지지 않도록 나름 신경 써주기(쟤네 집에 팩들이 제일 많으니까), 내 차례 안 돌아온다고 삐치지 않기(아쉬운 대로, 딴 녀석이 플레이 하는 거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재밌긴 함), 그냥 우리끼리 같이 모일 수 있어서 좋은 거(끝판 같이 깨면 더 좋고).
뭐랄까, 정말 물아일체의 집중력을 발휘하면서도, 나를 간지럽히고 입바람 불고 소리 지르고 TV 앞에서 팔 벌려 뛰기를 하는 놈들을 계속 배려해줄 수밖에 없었던, 나 혼자만 오락기를 차지하기란 역시 남한테 꽤 미안하고 성가신 일임을 온몸으로 감각했던, 이런 오락철학(?)이 저와 제 친구들한테는 공유돼 있었던 것 같습니다.
90년대 초반 오락실 세대이자 오락실 문화를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향유했던 일인으로서, <레디 플레이어 원>의 ‘오아시스’라는 게임은 낯설지만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MMORPG, 즉 다중접속역할수행 게임이라는 것을 플레이해본 적 없어서 낯설었습니다. MMORPG의 ‘MMO’는 ‘Massive Multi-user Online’을 뜻하죠. 이 ‘어마무시하게 많은 유저(플레이어)들이 실시간 동시 접속 가능한 온라인’이라는 개념이 잘 체감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90년대 후반엔 ‘스타크래프트’를 즐기며 애들(오락실 다니고 슈퍼패미콤 보유 가정으로 결집하던 그 녀석들)끼리 팀 대항전과 배틀넷도 했습니다. ‘멀티-유저’ 게임이라곤 기껏해야 2인용 오락뿐이었던 우리한테 최대 8명(4 대 4) 동시 플레이는 신세계였죠. 이때 신세계란 관념어입니다만, MMORPG는 게임 회사의 거대 서버를 기반으로 그야말로 실(제)감 나는 신세계를 펼쳐놓는 듯합니다. 게임 하나당 동시 접속 플레이어 수가 십만 단위에 달한다고 하죠.
그럼에도 ‘오아시스’가 익숙했던 이유는 가상공간의 캐릭터들(플레이어들 혹은 유저들)이 지닌 육체성 때문입니다. ‘오아시스’에 접속하려면 특수 장비를 착용해야 하고, 현실 몸뚱어리의 움직임대로 게임 속 캐릭터가 행동하게 됩니다. 캐릭터를 걷거나 뛰게 하려면 플레이어도 트레드밀 같은 발판을 밟으며 걷거나 뛰어야 합니다. 게임 속에서 돌려차기를 맞으면, 그 충격으로 현실의 몸이 빙그르르 휘청입니다. 90년대 오락실 문화에서도 이 ‘오아시스’의 사례와 유사한 육체성이 엿보이는데요. 게임 캐릭터 이동방향에 따라 현실 플레이어의 고개나 상반신이 기울어지거나, 구덩이에 빠지지 않으려 점프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게 되거나, 게임오버에 대한 분함을 고함과 절규로 표출하거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이패드를 먼저 거머쥐기 위해 친구 놈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뭐 이런···. 게임 시작 전부터, 시작한 뒤엔 더더욱 온몸으로 몰입했기에 가능했던 신체 반응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볼 따름입니다. 즉, 게임 시작 전부터, 시작 뒤엔 더더욱, 나는 해당 게임의 캐릭터가 ‘된’ 것과 같은 상태인 것이죠.
이런 극도의 몰입, 캐릭터―되기를 통해 게임 세계와 현실 세계는 플레이어의 몸을 매개로 연결―접속되는 듯합니다. 그 순간, 나는 마리오가 되고(마리오―되기), 동키콩이 되고(동키콩―되기), 춘리가 됩니다(춘리―되기). <레디 플레이어 원>의 주인공 웨이드(타이 쉐리던 분)는 ‘오아시스’ 속 자기 캐릭터인 퍼시벌(Parzival)이 됩니다(퍼시벌―되기).
[1]
<에스키모―되기>. 이것은 에스키모를 흉내 내는 것도, 모방하는 것도, 당신을 에스키모와 동일시하는 것도, 에스키모의 입장을 수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에스키모와 당신 사이에 무엇인가를 배치하는 것이죠. 에스키모 자신이 다른 것으로 생성되지 않는 한, 당신은 에스키모가 될 수 없으니까요.
_ 질 들뢰즈, 클레르 파르네, 『디알로그』(동문선, 2005), 105쪽
[2]
“가장 지독한 미움에서부터 가장 열정적인 사랑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혼의 미묘한 공감들.” 이것이 바로 배치입니다.
_ 같은 책, 103쪽
* 따옴표 안의 문장은 화자인 철학자 들뢰즈가 시인 D.H. 로렌스가 쓴 『미국고전문학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필자 주
인용문 [1]은 왠지 오락/게임하는 플레이어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합니다. 그렇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내가 마리오가 ‘되었을’ 때, 나와 마리오 사이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무언가가 생성돼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덟아홉 살 무렵에 저는 친구들보다 키가 작은 편이었는데, 마리오가 버섯을 먹고 키 큰 슈퍼마리오가 되거나, 장애물과 악당을 못 피해 작달막한 마리오로 졸아들 때 엄청 격정적으로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지금 생각해보니···.) 빨리 자라고 싶은 녀석이었던지라 버섯 하나 꿀꺽했다고 쑥 크는 마리오가 내심 부러웠었나봅니다. 마리오와 저 사이엔 ‘성장’이라는 열정이 인용문 [2]의 설명처럼 “배치”돼 있었던 것일 테고, 그로 말미암아 제 마리오―되기는 이루어졌을 겁니다. “에스키모 자신이 다른 것으로 생성되지 않는 한, 당신은 에스키모가 될 수 없”다는 인용문 [1]의 마지막 문장을 음미해보면, 제게 마리오는 ‘키 잘 크는 애’로 생성돼 있었달까요. ‘슈퍼마리오’ 개발자가 메인 캐릭터 마리오를 ‘키 잘 크는 애’쯤으로 설정해두었을 리는 만무합니다. 마리오는 악당 쿠퍼에 맞서 아리따운 데이지 공주와 그녀의 왕국을 구하는 ‘슈퍼’ 히어로잖아요. 하지만 키 작은 어느 꼬맹이 플레이어에게 마리오는 그런 완성태와는 “다른 것”이었던 셈입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웨이드도 게임 속 자기 캐릭터인 퍼시발과의 사이에 뭔가를 배치했습니다. 웨이드와 퍼시발을 잇는 뭔가가 생성된 것이죠. 그것은 제 생각에 ‘자유’와 ‘연대’입니다. 처음엔 ‘자유’만 있다가 나중엔 ‘연대’가 더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그의 대사처럼 “어디든 갈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애초의 플레이 동기였고, 여기에 다른 플레이어들과의 연대가 합쳐지면서 ‘자유로운 플레이어들의 연대’라는 큰 가치가 생성된 것입니다.
‘오아시스’는 최다 플레이어를 보유한 사상 최대 규모의 게임입니다. 개발자인 할리데이(마크 라이런스 분)의 유언으로 플레이 열기가 더 뜨거워집니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공평하게 참가할 수 있는 3개 경기를 마련해두었고, 이 3종 경기 최종 우승자에게 자기 유산과 ‘오아시스’ 통제권을 주겠다는 선포입니다. 이 과정에 IOI라는 게임 개발 분야 대기업도 끼어듭니다. ‘오아시스’를 점유하면 어마어마한 플레이어들을 고객으로 유치할 수 있고, MMORPG 독점 기업으로 몸집 키우기가 손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빈민촌 거주민인 웨이드는 이 IOI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죠. 우승을 놓고 경합하는 것이 아니라, IOI라는 대기업에게 ‘오아시스’가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한 투쟁입니다. 미취업 청년인 웨이드는 『자본론』의 표현대로라면 ‘산업예비군’에 해당하죠. 그러니 웨이드와 IOI의 대결은 ‘가난한 산업예비군 대 대기업’이라는 도식으로도 그럴싸합니다. 또한 IOI 대표인 소렌토(벤 멘델존 분)와 대립하는 극적 구도에 근거하여, ‘가난한 산업예비군 대 자본가계급’으로 도식화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사투(소렌토는 웨이드를 살해하려고 빈민촌을 폭파시켜 무고한 거주민들을 죽게 만들기도 합니다)를 벌이며 웨이드의 퍼시발―되기 형태는 점차 딴딴해지는데, 이 과정에서 발현되는 ‘자유’와 ‘연대’라는 가치 생성을 지켜보는 일이 <레디 플레이어 원> 관람의 묘미입니다.
‘오아시스’는 게임입니다. ‘오아시스’에 접속한다는 것은 게임하러, 오락하러, 놀러 가는 겁니다. 그런데 IOI라는 대기업이 개입하면서 이 게임판/오락판/놀자판이 좀 이상하게 변질됩니다. 플레이어들의 ‘아이템 현질’을 이용해 이 회사가 일종의 대출업을 시작하면서죠. ‘오아시스’에서는 금색 코인이 화폐처럼 통용되고 있습니다. IOI는 플레이어들에게 이 코인을 대출해주고, 상환 불이행 시 노예로 부립니다. 해당 플레이어들은 IOI 내 ‘로얄티 센터’라는 착취 공간 안에 개별 감금되고, 그 안에서 계속 육체노동을 해 ‘오아시스’ 속 가상의 노동 현장에서 빚을 갚아나가야 합니다. 다른 맵으로의 이동은 불가능해지며, 동일한 작업복을 강제받습니다. 의류 아이템 구매 같은 일체의 자유 의지는 ‘오아시스’ 노동 현장 감시원 캐릭터들(전부 IOI 직원들이 플레이하는 캐릭터들)의 무력 감시 하에 통제됩니다. 이를테면 노동력 담보 대출 상품인 것인데, 세계 경제 위기를 촉발시켰던 미국 금융권의 각종 파생상품과도 비슷합니다.
코인 못 갚을까 두려워 아이템을 안 살 수는 없습니다. 플레이 타임과 비례해 플레이어의 레벨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렙업 상태에 따라 필요 아이템도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키 작은 마리오가 버섯을 먹고 키 큰 슈퍼마리오로 레벨업을 했다면, 캐릭터 신체 사이즈에 적합한 탈것, 입을 것, 신을 것 등등도 교체해줘야 하니까요. 영화 속에선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는데, 실제 MMORPG는 일정 레벨의 플레이어들만 플레이 가능한 맵이 분류돼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레벨 플레이어들이 초급 맵에서 일정시간 플레이를 마치고 일정량의 경험치를 쌓아 기준 레벨을 달성하고 나면, 중급 맵의 잠금이 풀리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레벨업을 위해선, 다른 맵을 경험하기 위해선, 보다 적절하고 기능 좋은 아이템이 필요하게 됩니다. 공격무기가 막대기 대 장검이라면, 막대기를 든 쪽은 장검이 필요하게 되는 법이죠. 아이템을 구매하지 않으면 플레이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겁니다. 막대기만 휘두르다 계속 장검에 찔려 게임오버 될 테니까요. 이 구조를 내려다보는 거대기업 IOI는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내놓습니다. 사도록, 안 살 수 없도록, 안 사면 손해 보도록, 사야만 플레이가 지속되도록.
그런가 하면 IOI 대표 소렌토는 렙업 과정 없이 곧장 만렙(거대 괴수 ‘메가 고지라’ 소환이 가능한) 캐릭터로 ‘오아시스’를 누빕니다. 불로소득, 아니, 불로렙업인 셈이죠. IOI 직원들도 ‘오아시스’ 접속 시 무장경찰 혹은 특수요원 형태의 캐릭터를 부여받습니다. 소렌토처럼 이들 또한 노력 없이 ‘공격력’이라는 능력치를 증여받은 것입니다.
코인 대출업으로 플레이어들을 착취하고, 스타트 레벨 자체가 일반 플레이어들과는 다른 IOI에게, 코인이란 한마디로 독점자본이 돼버리는 셈입니다. 이런 IOI가 만약 ‘오아시스’의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해버린다면? “게임의 즐거움은 엔딩 클리어가 아니라 플레이 과정 자체”라는 할리데이의 꿈은 산산조각나겠죠. 그 꿈을 공유하며 ‘오아시스’에 입장한 다수 대중 플레이어들의 ‘플레이의 질’ 또한 박살나버릴 겁니다.
상황이 이렇습니다. 그러니 IOI가 ‘오아시스’를 장악하면 ‘게임판/오락판/놀자판’은 영영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할리데이도 죽기 전 똑같이 우려했었나봅니다. ‘오아시스’의 플레이어들은 다수 대중이고, 그들을 억압하는 IOI는 일개 거대 기업이죠. 99퍼센트 대 1퍼센트의 싸움입니다. 99퍼센트 대중이 승리하도록 3종 경기의 비책을 ‘대중 문화(pop culture)' 속에 숨겨놓겠다, 라는 것이 할리데이의 묘안이었던 겁니다. 그의 바이오그래피를 줄줄 외울 만큼 ’덕후‘인 웨이드가 이런 속내를 간파하지 못할 리 없죠. 그래서 99퍼센트의 플레이어 대중을 호집하며 이렇게 외칠 수 있었겠죠. “기꺼이 싸우겠습니까(Are you willing to fight)?!”
[3]
(···) “마주침의 유물론”이라 할 수 있는 유례 없는 철학, 그리고 그와 같이, 예정된(préétabli) 어떤 것도 가정하지 않는 (···) 완성된 사실의 필연성에 입각해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야 할 사실에 입각해서 사고한다. (···) 그것들은 세계의 통일이 그것들을, 그것들에 실존을 부여할 마주침 속에서, 통일하지 않는 한 실존하지 않으며, 다만 추상적으로만 있을 뿐이다. (···) 독자들은 이 철학 속에, 마주침은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양자택일이 군림하고 있음에 주목했을 것이다. 이 양자택일에 앞서서 사전에 어떤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고 어떤 결정의 원리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
_ 루이 알튀세르, 「마주침의 유물론」, 『철학과 맑스주의 -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중원문화, 2017),
46쪽
‘오아시스’ 속에서 웨이드가 자주 들락거리는 곳이 있죠. 할리데이의 바이오그래피 자료를 영상 데이터로 아카이빙 해놓은 할리데이 저널(Halliday Journal)입니다. 영화 초반, 이곳에서 웨이드는 영상 데이터 하나를 열람합니다. 게임 개발 파트너였던 할리데이와 모로우(사이먼 페그 분)의 젊은 시절 언쟁 내용입니다.
모로우
“야 인마, 투자라는 건 책임이 따른다고. 투자자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걸 만들려면, 너가 너 자신을 잘 통제할 줄도 알아야지. 너도 규칙이란 걸 좀 만들어야 한다니까?”
(Look, invention comes with responsibilities. If you make something people want or need, then it's up to you to set the limits. You have to make some rules.)
할리데이
“난 규칙 같은 거 더 만들기 싫다고.”
(I don't wanna make any more rules.)
둘의 게임 회사가 잘나가서 투자자들도 생겼나봅니다. 경영 감각이 있는 모로우는 규모 있고 규칙을 갖춘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반면 할리데이는 여전히 긱(Geek) 기질이 강한지라 비즈니스는 영 딴나라 얘기로 여기고 있고요. 할리데이와 모로우의 언쟁 자료는 웨이드/퍼시발이 가장 좋아하는 영상입니다. 그는 딴 플레이어들과 할리데이에 대해 얘기할 때 ”그는 규칙 만들기를 증오해(He hated making rules)"라며 실제 만나보기라도 한 것처럼 굴기도 하죠.
규칙 같은 거 더 만들기 싫고, 규칙 만들기를 증오하는 할리데이의 세계가 바로 ‘오아시스’입니다. 규칙이 있을 리 없거니와, 규칙적이어서도 안 되는 곳이죠. 위 인용문 [3]과도 제법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예정된 어떤 것도 가정하지 않는” 세계, “완성된 사실의 필연성”이 아닌 “완성해야 할 사실”이 중요한 세계. 인용문의 화자인 철학자 알튀세르는 이런 세계의 성질을 ‘우발성’ 혹은 ‘마주침’이라 설명합니다.
그러고 보니 ‘오아시스’ 플레이어들이 딱 그러합니다. 그들의 플레이는 우발적이고(맵의 어디에서 어떤 장애물이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고, 특정 플레이어들과 팀업을 이루는 것도 대체로 우발적으로 결정되죠), 그런 우발성의 플레이 속에서 다수 플레이어들과 끊임없이 마주칩니다. 이때의 마주침이란, 옷깃 좀 스쳤다고 (무려) 전생의 인연으로 묶여버리는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은 아닙니다. 평행으로 내리던 빗줄기 하나가 엇비스듬해질 때, 그 우발성으로 곁의 다른 빗줄기와 만나게 되는 마주침입니다. 우발성/마주침은 ‘가로지르기’ 내지는 ‘횡단’ 같은 말로도 표현됩니다. 오직 나만 잘살자고 직진하는 인생이 평행선이라면, 나 자신을 가로지르고 내게 익숙한 시공간을 횡단해 타인에게 가 닿는 것은 분명 사선입니다. 빗줄기가 엇비스듬해지듯이 서로가 서로의 직진을 내려놓고 마주치게 되는 현생의 인연이 생성되는 것이죠. 이 생성을 통해 나는 비로소 타자를 헤아릴 수 있게 될 겁니다. 나―되기 못지않게 타자―되기 또한 삶의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위 인용문 [3]에서 암시하듯, 이런 마주침은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양자택일”입니다. 그래서 ‘확정적’이 아니라 ‘우발적’인 것이겠죠.
개발자부터가 규칙을 싫어했고, 그 성향을 한껏 쏟아부어 창조해낸 세계이므로, ‘오아시스’의 플레이어들끼리는 우발성의 플레이와 마주침의 콘티뉴를 잘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거대기업 IOI는 이 ‘세계’를 ‘시장’으로 바꾸려 하는 세력이죠. 이 회사가 ‘오아시스’를 장악한다면, 코인 대출업을 비롯한 각종 ‘현질’ 파생상품 출시, 플레이어 간 레벨 격차 심화, 플레이 자체의 즐거움보다 고사양 아이템 획득 경쟁 및 렙업 지상주의에 따른 코인―신(神) 주의 팽배, 그로 인한 싱글플레이 주의 만연 등등 부작용이 발생할 것입니다. 우발성과 마주침은 사라지고, 게임의 법칙―소렌토와 간부급 직원 프넬(한나 존-카멘 분)은 “The rules of war”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하기도 하죠―에 의해 위너와 루저가 게임 스타트 때부터 정해지는 구조가 뿌리 내릴지도 모르고요. ‘오아시스’ 대재벌로 격상한 소렌토의 친인척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불로렙업 혜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웨이드/퍼시발의 우승도 실은 우발적 사건입니다. 할리데이가 우승자를 내정해두진 않았을 테니까요. ‘오아시스’의 통제권을 갖게 된 뒤, 그는 IOI가 ‘오아시스’ 플레이어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던 노동력 담보 코인 대출 및 채무 노예 제도를 파기합니다. 이로써 시장으로 변질될 위기였던 ’오아시스‘는 다시금 (할리데이의 창작/창조 의도대로) 무규칙의 세계, 게임판/오락판/놀자판으로 복구됩니다. 자칫 IOI라는 일인/일자(一者)/일개 자본가/대기업/놀-줄-도-모르고-돈-벌-줄만-아는-집단에 의해 끝장날 뻔했으나, 할리데이의 무규칙 정신을 계승한 웨이드/퍼시발과 자유로운 플레이어들의 연대로써 ‘오아시스’는 지속성을 획득한 겁니다. 3개 경기 중 마지막까지 클리어한 웨이드/퍼시발 앞에 할리데이가 화현합니다. 그의 작별인사는 감사인사였죠. “플레이해줘서 고맙다(Thank you for playing my game).” 만약 2018년의 대한민국 사회가 ‘오아시스’와 같은 MMORPG의 세계라면, 그리고 개발자 또한 할리데이와 같은 무규칙/우발성/마주침의 세계를 꿈꾸는 인물이라면, 개발자가 내게 “살아줘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할 법한 그런 삶을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살고 있는가도 곰곰 고민해보게 됩니다.
일인의 엔딩을 다수의 콘티뉴로 재분배한 역대급 플레이. <레디 플레이어 원>은 재관람 욕구를 자극하며 끝나도 끝나지 않은 채로 이렇듯 한 관람객의 뇌리에 남게 됐습니다.
사족입니다만, <레디 플레이어 원>에는 80년대 팝 넘버들이 많이 나옵니다. 반 헤일런, 빌리 아이돌, 비지스, 홀 앤 오츠 등등. 그런데 (스코어 앨범 말고) 오리지널 사운드트랙 앨범에 티어스 포 피어스의 ’Everybody Wants to Rule the World'가 수록돼 있더군요. ‘모두가 이 세상을 지배하길 원하죠’라는 얘기인데, 영화에 삽입됐더라면 상당히 어색해질 뻔했습니다. 엔딩곡인 홀 앤 오츠의 ‘You Make My Dreams'는 적절했던 것 같습니다.
안 읽으셔도 상관없는
여전히 ‘게임’보다는 ‘오락’이라는 말이 더 입에 잘 붙습니다. 이 글에선 영화 제목 키워드와의 통일성을 위해 ‘플레이어’라 칭했지만, 오락실 시절을 돌이켜보면 ’오락하는 애‘를 지시하는 특별한 호칭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좀 잘하는 애들은 ‘오락꾼’으로 불리긴 했습니다.
오락은 오락기로, 사진 촬영은 카메라로, 사진 보기는 앨범으로, 음악은 라디오나 전축으로. 제가 경험한 90년대 오락실 시절의 대중문화 향유 방식은 이랬습니다. 각 문화마다 고유의 플랫폼이 개별적으로 적확히 짝지어져 있었고, 서로 간 연동이나 동기화 개념은 아직 태동하지 못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식의 물건 쓰임새는 분명 그 시절 꼬맹이들의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오락 잘하는 ‘꾼’은 어른 되면 오락왕으로 돈 많이 벌 줄 알았고, 카메라 만지작거리던 녀석은 사진관을 하게 될 줄 알았고, 누나 방에서 라디오 듣는다는 놈은 뉴스 기자나 디제이 같은 걸 할 줄 알았습니다. 동네 어르신들끼리 모이면 “쟤는 그렇게 카메라만 종일 들여다보대. 사진작가 되려나보지.” 같은 순진한 장래 예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습니다.(물론,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녀석에겐 가차없는 “너 커서 뭐 될 거야!” 불호령···.) 어른들뿐 아니라 애들도 똑같았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물들처럼 우리도 뭐 다 제각기 쓰임새 있는 어른이 되지 않을까, 이런 순진한 장래 예측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겁니다.
오락실 같이 다니고 이 집 저 집 몰려다니며 오락기 붙잡던 놈들이 각자 다른 중학교로 배정받으면서, 우리의 오락실 문화는 사실상 종말을 맞았던 것 같습니다. 중학생이 된 뒤로는 왁자지껄 우르르 와르르 까르르 낄낄대고 소리 지르면서 오락한 일이 없습니다. 다행히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된 덕분에 PC방에서 옛 오락실 문화를 절반쯤 재현해보긴 했습니다. 그마저도 역시 잠깐이었지만.
오락실 시절에 저와 제 친구들이 해댔던 오락들은 주로 횡스크롤 액션(‘파이널 파이트’, ‘캐딜락 앤드 다이너소어’), 대전 액션(‘슈퍼스트리트파이터 제로’, ‘킹오브파이터즈’, ‘아랑전설’) 위주였습니다. 저나 제 친구들도 그렇고, 우리랑 자주 마주쳤던 딴 학교 오락실 패거리들도 그렇고, 오락의 목적은 오로지 ‘백 원으로 오래 버티기’였습니다. 당시 오락들은 ‘렙업’이나 ‘캐릭터 키우기’ 같은 개념들이 도입되지 않았기도 해서, 오락하는 애들은 말 그대로 오락행위 자체에 몰두했던 것 같습니다. 인기 있는 오락기 앞에는 줄이 길었는데, 백 원 넣고 혼자 오래 하는 녀석 때문에 한 시간 넘게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때마침 오락실에 ‘짱’이 와 있고, 하필 걔가 기다리는 오락기의 줄이 줄어들 기미가 안 보이면, 백 원으로 오락기 독점하던 놈은 무력에 의해 끌어내지기도 했습니다.(물론, 그러고는 ‘짱’이 새치기···.) 그래서 저의 ‘백 원으로 끝판 깨기’ 종목인 ‘파이날 파이트’와 ‘캐딜락 앤드 다이너소어’ 쪽에 줄이 길고 ‘짱’이 뜬 날이면, 저는 아예 그 두 오락기 근처에도 안 가거나 조이스틱을 잡고 있더라도 짐짓 실수하는 척 얼른 게임오버를 자행하는 배려(!)도 스스로 터득했습니다.
얼마 전에 라디오를 듣다가 웃었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은 문서작성 툴의 ‘저장’ 아이콘이 무엇을 형상화한 것인지 전혀 모른다는 청취자 사연 때문에. 그렇겠죠. 플로피 디스크를 본 적이 없으니. 플로피 디스크 하면 또 온갖 에피소드들이 줄줄이 튀어나옵니다. 플로피 디스크 여섯 장짜리로 된 패키지 게임을 어떤 녀석이 샀는데 설치를 못하고 있어서 동네 애들 불러 모아가지고 걔네 집에 가서 DOS 명령어 더듬더듬 입력해가며 겨우 깔아줬던, 뭐 그런 기억들이 수두룩합니다.
어느덧 어린이들에게서 제법 자주 ‘아저씨’로 불리게 됐습니다. 걔네들도 90년대의 저와 제 친구들처럼 모여서 게임을 합니다. 오락기와 카메라와 라디오와 전축을 하나로 수렴한 스마트폰으로 친구들끼리 멀티플레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사는 동네의 경우엔 애들이 놀이터 벤치에 앉아서 각자 폰을 들고 게임을 합니다. 편의점에서 게임판을 벌이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지금 게임하는 어린이들도 자기들만의 문화를 쌓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본인들이 쌓는다고 쌓아지는 건 아니고, 같이 우르르 와르르 까르르 낄낄거리며 게임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발생/생성하는 게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게임 캐릭터의 렙업과 자기 현실에서의 출세욕을 동일시하지 않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어른 돼서 게임하던 시절을 떠올릴 때, 몰려 다니던 게임 친구들 생각이 제일 먼저 났으면 좋겠습니다. 그 녀석들의 간지럽힘, 입김, 팔 벌려 뛰기(는 요새 안 하려나요) 같은 몸과 몸의 마주침의 기억들을 머릿속에 잘 저장해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렙 캐릭’보다 렙업 실패해서 소리 지르고 짜증 부리는 친구 녀석 골난 얼굴과 볼멘소리를 선명히 마음에 담아두었으면 좋겠습니다.
렙업 좀 못해도, 게임 좀 안 풀려도, 변함없이 나를 간지럽히고 내 귀에 입김 불고 내 눈앞에서 요상한 춤을 추는 친구들이 어른 된 뒤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승진 좀 못해도, 인생 좀 안 풀려도, 변함없이 친구들과 우르르 와르르 낄낄댈 수 있도록. 누군가의 게임오버를 콘티뉴로 만들어주는 연대가 자연스럽도록.
글_나우어(NOWer)
_글 쓰는 일을 합니다
_저작 및 공저작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성공한 영화들의 스토리텔링 키워드 분석> (피시스북 출판사)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 (달 출판사)
<소셜 피플>(12부작) (커뮤니케이션북스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