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비행사가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을 잊지 말라는”
김은 시집들 안을 서성였다. 기역니은디귿순이 시집 제목 첫 자의 초성 배열순인 줄 알고 이응 칸 앞에서 한참 헤맸다. 그러다 뒤늦게 시인들의 성 첫소리가 분류 기준임을 파악하고는 기역 칸으로 향했다. 자음들을 거슬러 가는 동안, 마지막으로 여기에 왔던 이 년 전 어느 주말과, 서가들을 능숙히 넘나들던 선배의 상이 떠오르기도 했다.
유일한 시집 외에 그 시인의 전집이 출간돼 있다는 사실을, 김은 어제저녁 기 덕분에 기억해냈다.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된다는 시사 팟캐스트를 틀어놓고도, 기는 전날 취재한 우성그룹 창조청년 창업지원 설명회 리뷰 작성에 잘도 집중했다. 참석한 스타트업 대표들이 거의 제 또래던데요, 저도 나름 간접적 창업 경험자라 참석자들 인터뷰할 때 말이 좀 통하던데요, ······. 어른이대공원 이후 몰라보게 수다스러워졌다고, 김은 기의 한 달 전 뻣뻣함과 요즘을 내심 대조했다.
원고 쓰는 내내 입을 안 다물던 기는 인천집 얘기를 또 꺼냈다. 술 마실 때 듣지 못한 세세한 개업 과정까지 읊어대다가, 그 시인을 또 언급했다.
친구 말로는요, 전집에 수록된 미발표 시들도 좋대요. 소설이랑 산문도 실려 있어서 시집하고는 판형이 완전히 다르대요.
전집 제목은 『입 속의 검은 잎』이 아니었다. 이응 칸을 기웃대던 제 무지가 김은 민망스러웠다. 기의 말대로 『기형도 전집』은 시집보다 크고 두꺼웠다. 표지 색은 시집과 비슷한 황색이지만, 얼굴이 달랐다. 전집에는 캐리커처가 아닌 사진이 인쇄돼 있었다. 시인의 자필 몇 줄이 새겨진 앞뒷면도 시집과의 차이점이었다.
시인의 얼굴은 가는 줄글에 비끼어 누른 빛깔 여백 위에 교통카드 절반쯤 크기로 떠 있었다. 약간 틀어진 자세로 입을 다문 시집과는 다르게, 전집은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 정면의 상이었다. 다만, 옆의 어딘가를 향해 있는 눈만은 둘이 동일했다.
김은 머리를 갸울여 전집과 연관된 선배의 먼 말들을 걸러내보았다. 양행걸침의 고백이 있기 전 어느 날이 어름어름 쏠려 나왔다. 삼백쪽이 넘는 분량이라고, 소장도 했고 여러 번 읽었다고, 하지만 너한테 권하기는 싫다고. 딱딱한 데다 두껍기까지 해서 지레 겁먹을 것 같다고, 외국어 원서처럼 여기게 될 거라고. 팝송 듣기도 전에 영어 가사에 질릴까 봐 걱정된다고···
그러니까, 넌 나랑 이 시집부터 같이 읽어.
스스로 읽어낼 수 있기 전까지는.
김은 간행사와 편집자의 말을 읽은 뒤 차례 면을 살폈다. 선배의 우려대로 시들의 양에 압도당했다. 『입 속의 검은 잎』에 더해, 시인의 5주기 추모 문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 실렸던 미발표 시, 전집 편찬 과정에서 추가로 발견된 또 다른 미발표 시 들이 수두룩했다. 단편소설과 콩트, 여행기나 일기 같은 산문 수도 적잖았다. 특히 ‘새로 찾아낸 미발표 시’라는 제하의 스무 편은, 한글 독음 없이 한자 제목 그대로 표기된 시들이 상당수였다. 음독 불가인 시제들 앞에서, 김은 대학 시절의 한자 자격증 취득을 열없어 했다. 그나마 스물에 하나는 해독할 수 있었다. 귀, 가. 유일하게 알아본 「歸嫁」의 백육십일 쪽을 김은 열었다.
집은 멀기만 한데
신발 끈이 자꾸만 풀어져요.
당신을 잊고 있는 밤이면, 어머니
宇宙飛行士가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이
우리집 꽃밭에 소리없이
별똥처럼 내려앉을 것입니다
전체 열세 행 중, 이 일곱째부터 마지막 행까지가 김은 좋았다. “當身이 洗手하신 물에선”이라는 첫 행은 온전히 독음하지 못했만, 십행의 한자어는 우주비행사, 라고 읽을 수 있었다. “신발 끈” 묶느라 땅만 쳐다보기 바쁜 귀갓길에, 화자는 “어머니” 한번 올려다보려고 지구 밖 “飛行士”의 “장갑” 분실까지 상상한 것 같았다. “당신을 잊”지 않으려고 지상에서 “宇宙”로 시선을 확장시키는 시인의 심상이, 김은 “꽃밭에 소리없이” “내려앉”은 “별통처럼” 곱다고 감상했다.
구매한 전집을 들고 김은 기역 서가로 되돌아왔다. 꽂혀 있는 전집 하나를 빼내, 자신의 머리 높이 칸에 정면으로 세워보았다. 시인의 선명한 얼굴이 수평에 놓이니, 책 속에 살던 시인이 책 밖으로 쓰윽 상체를 내미는 모양새 같았다. 시인은 얼굴은 정면으로 한 채 눈동자만 움직여 옆을 보는 모습이었는데, 왠지 김에게는 자신을 향한 눈짓처럼 느껴졌다.
저기, 저-쪽으로 가보라는, 앞만 보지 말고 저-기,
저쪽도 한번 봐보라는, “宇宙飛行士가 잃어버린 / 장갑 한 짝”을
“잊”지 말라는,
시인의 충고 같았다.
시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김은 걸어가보았다.
커피나 물 같은 거 안 드셨죠? 화장실은 미리 다녀오시는 게 좋대요. 저는 방금 들렀다 왔어요.
서점 빌딩 앞에서 만난 기는 비니 모자와 귀덮개로 머리를 싸맨 차림이었다. 딱 성냥팔이 소년이라고, 김은 실실 놀렸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설마 동화처럼 혼자 죽게 내버려두겠어요.
흰소리를 참 어둡게도 안는다고, 김은 혼자 생각하며 검은 코트 주머니 안의 엘이디 초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와본 이 속에서, 김은 최근 거듭 재독 중인 시를 생각했다. 거반쯤은 곧잘 외우게 된 시였다. 「專門家」 이후 두 번째로 혼자 열고 읽은, 「우리 동네 목사님」이었다.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는 「白夜」와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라고 한 「안개」가 “딱딱한” “하늘”과 “태양”을 공유하듯, 「專門家」와 「우리 동네 목사님」도 “송판”을 맞물고 있었다.
(···)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專門家」의 “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 / 주장하는 아이”가 자라 「우리 동네 목사님」이 된 것이라고, 김은 가정했다.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 찬송하는” 일을 왠지 이 “목사님”은 「專門家」의 “유리” “갈아끼우”기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고, 그래서 성경 구절을 목청껏 낭독하거나 찬송가를 제창하기보다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아이 시절의 “그 골목”에 이어 또다시 “마을”에서도 추방된 거라고, 김은 읽었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들이 어둠을 덮는 빛이라면, 밤하늘의 “하나둘 맑은 별들”은 어둠을 긍정하는 빛일 것이고, “목사”는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은 어둠을 받아들여, 그 어둑한 “생활에 밑줄을 그어”가며 신앙생활을 잇는 중이 아닐까.
오래전 「專門家」에게 추방 당할 때 들고 온 그 “견고한 송판”들, “풍성한 햇빛을 복사”하던 “유리담장”을 깨뜨릴 그 진실한 “송판”들이, “목사”가 된 아이에게는 곧 “성경책”이자 복음 아닐까.
그러나 “송판”들은 “큰 소리”로도 “기도”로도 “손뼉”으로도 세워질 수 없고, 다만 사람들 각자가 “생활에 밑줄을 그어”가며 어둠 곁의 “맑은 별들”로 켜질 때만 일으켜세워지는 것이 아닐까.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 망치질”, 생계를 위해 매일 “주섬주섬” “챙겨들”어야 하는 누구나의 “공구”, 이것들이 죄다 하나하나의 “송판”을 세우고 “유리담장”을 깨부수는 힘이며 연장이 아닐까, ······. 촛불들 속에서 김은 새로운 해석들을 잇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에서 쫓겨난 “목사님”은 「가수는 입을 다무네」의 “나”로 늙어간다, 그러고는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 채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같은 회한을 읊는다, 그럴수록 「專門家」들은 더 지독해진다, 한때 “목사”였던 “가수”에게서 “송판”들을 빼앗는다,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도록, 사람들이 어둠을 올려다보지 못하도록, “송판”들로 “하늘”을 덮어둔다, “송판”들은 “하늘”을 가리기 충분한 양이다, “딱딱한 널빤지” 같은 “하늘”에 「안개」 속 “노랗고 딱딱한 태양”까지 복사해 걸어둔다, 밤에도 “풍성한 햇빛을 복사”해 매일 “이 무서운 白夜”를 켜둔다, 어둠은 “白夜”에 가려지고 부정된다, 「우리 동네 목사님」이 좋아하던 밤하늘의 “맑은 별들”은 영영 꺼져버린다, “골목”“골목”의 “유리담장”들은 이제 “자욱이 안개”까지 뿜으며 지상을 희누르게 질식시킨다, ······. 촛불을 들고 김은, 몇 안 되는 아는 시들을 연결시켜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다.
입을 다물면 안 된다. 아무도 추방되면 안 된다. 김은 이야기의 주제까지 멋대로 정했다. 시를 이런 식으로 읽어도 되는 것인지는 소신껏 단정짓지 못했다. 언젠가 선배를 만나면 자신의 오독을 들려주겠다고 김은 마음먹었다. 이런 것도 자기 목소리라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오늘의 가수는 어린 왕자가 아니었다. 맨발 공연으로 유명한 여가수였다. 지금은 맨발이 아니었지만, 가수는 맨발인 듯 몸을 떨고 발을 굴렀다. 가수가 입을 열 때마다 대형 스피커의 파동이 김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격했다. 볼이 흔들렸고, 곁의 기도 시려워 하고 있었다.
가수의 열린 입에 맞춰서, 마이크를 뻗은 채 다물린 입을 대신해서, 김과 기는 덜덜 떨고 구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린 왕자처럼, 오늘의 가수도 그로울링 창법을 섞어 노래하고 있었다.
그댄 모르죠 내게도 멋진
애인이 있다는 걸
너무 소중해 꼭 숨겨두었죠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
내 입술에 영원히 담아둘 거야
짐승들이 혼자서는 으르렁대지 않잖아, 눈앞에
천적이 있을 때만 그러잖아, 혼자 있을 때
나오는 목소리는 하울링이지, 하늘로
띄우는 거 그로울링은 정면으로 내보내는
목소리고, 으르렁거림은 침잠되는 법 없이 땅에
퍼지고 하늘로 떠오르거든, 말끔하게
위로만 띄우던 고성을 점점 정면으로 긁어
내렸잖아 조준점이 확실해진 거지, 영점 사격
같은 세월을 거친 거지
알겠죠 나 혼자 아닌 걸요
안쓰러워 말아요
언젠가는 그 사람 소개할게요
영점은 사람 얼굴에 따라 다르게
조절된대, 각자 생김새를 반영해서 표적을
겨누는 거래, 얼굴에 따라 반동이 다르대 진짜
살 떨리는 일이지 그로울링, 정면에
대고 으르렁거리는 거, 목소리를 명중시키는 거 반동에
흔들리지 않는 얼굴은 없어
김은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동시에 선배의 말들을 양행걸침 식으로 재구성해보고 있었다. 가수의 음성처럼, 김도 기도 그로울링을 했다. 목을 긁어대느라 어느 순간부터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김은, 자신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가 닿아야 할 곳에 조준하려 안간힘을 썼다. 부사수 기도, 기 곁의 무수한 곁들도, 같은 지점을 향해 제 목소리들을 겨누는 중일 거라고 김은 생각했다.
스피커의 파동은 촛불뿐 아니라 촛불을 손에 쥔 얼굴도 거세게 흔들고 있어서, 김은 입을 열 때마다 헐떡거렸다. 촛불들이 가쁘게 떨수록 목소리들의 영점은 오차 없이 조절돼가고, 그렇게 한데로 뻗은 목소리들의 다발이 “둥글고 빈 통로”로서 이곳에 가설되는 중이라고, 김은 「어느 푸른 저녁」에 의역을 더한 자신만의 자막으로 지금 여기를 조심히 읽었다.
“푸른 유리병”처럼 열린 “통로” 안에서, 김은 그 배의 회항하는 엔진 소리를, 선배가 자기 시를 읽는 목소리를, 황 과장이 순산한 애봉이의 울음을 듣는 상상을 열었다.
저― 푸른 지붕을 타고 넘어, 바람이 인파 속에 길을 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많았고 그만큼 사람들의 사이 또한 무수했다. 길은 오랜 시간에 걸쳐 놓일 것이었다. 바람이 멎지 않도록, 김은 스스로 열려 있으려 안간힘을 썼다. 자꾸 닫히는 시집에 캔맥주를 올려놓듯, 김은 제 몸에 기형도를 바짝 붙였다.
연재 소설 <기형도를 오독하다> 끝.
2020. 4. 16. 목요일. 세월호 희생자 6주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