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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Jan 27. 2024

채워진 비어 있음 ②

“여기, 여백이 너무 무거운데요?”


시각 디자인학과는 보통 미술대학에 편성되어 있다. 디자인 매체 에디터이자 인터뷰어로서 들은 바로도 수험생 시절 미대 입시 학원을 다녔다고 말한 디자이너들이 적지 않았다. 자연히 디자인 비전공자가 근무 초기에 일차원적으로 이해한 시각 디자인은 미술의 한 분과라는 것이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데, 다만 좀더 구분을 지어 표현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시각 디자인이 미술에서 파생된 분야임을 전제로 할 때 그것은 동양화보다는 서양화의 양식에 보다 닿아 있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이해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역시나 여백 개념의 역할이 지대했다. 디자인 업계에서 일을 시작한 뒤 여백 개념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계기는 두 가지 실무 경험이었다. 첫 번째 일화는 어느 북 디자인 스튜디오를 취재하러 갔을 때 얘기다. 신입 디자이너가 아이맥 화면에 제 작업 내역을 띄워 놓고 검수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윽고 등장한 아트 디렉터는 화면의 한 부분을 검지로 짚으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 여백이 너무 무거운데요?” 이 단평이 꽤나 강렬하게 들렸다. ‘여백이 무겁다?’ 여백이 무거울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고, 여백에서 무게감을 느끼는 디자이너의 인식 체계도 생경했던 탓이다. 여백은 비어 있는 것, 그러니 가벼운 것이라는 기존의 관념으로는 디자인을 이해할 수 없겠다는 각성을 불현듯 했다. 신입 디자이너의 미숙한 여백만큼이나 취재하러 온 인터뷰어의 마음도 무거웠다.


두 번째 일화의 발화자는 한 서체 디자이너다. 역시나 인터뷰를 위한 만남이었고, 지금은 폐점한 서울 마포구의 어느 반지하 카페에서 두 시간 넘게 대화를 이어 갔다. 하도 오래전이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나 길게 했었고 인터뷰 기사를 어떻게 작성했는지는 까마득하다. 그럼에도 딱 한 가지 토픽만은 생생하다. 물론 여백에 관한 것이다.


“맑은 날 여름에, 오후 한 네 시나 다섯 시쯤 강가에 가 보신 적 있어요? 가만히 서서 강물을 바라보면 정신이 몽롱해지거든요. 흐르는 건 분명히 강물인데, 계속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강물은 가만히 있고 내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져요. 유람선에 탄 듯이. 글자 그리는 일도 비슷해요. 그려지는 건 분명히 획인데, 계속 작업하다 보면 그려지는 게 획이 아니라 여백이었다는 자각을 하게 되거든요. ‘가’를 그린다는 건, ‘ㄱ’과 ‘ㅏ’가 나타나도록 여백을 디자인하는 거예요.”


실제 발언은 이보다 훨씬 장광설인 데다 현학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듣는 순간에는 그냥 흘려 넘겼는데 이후 기사 작성을 위해 녹취록을 정리하면서 좀 멍해졌다. 뭔지는 몰라도 뭔가 대단한 걸 들었다는 느낌. 첫 번째 일화와 마찬가지로 여백이란 과연 무거운 고민거리였다.


두 가지 일화를 계기로 시각 디자인, 더 구체적으로는 그래픽 디자인과 서체 디자인의 여백에 관하여 궁리하게 되었다. 상당한 난제였던 이유가, 디자이너들이 언급하는 ‘시각적 여백’ 개념을 거듭해 들을수록 이론의 영역이기보다 감(感)과 촉(觸)의 산물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배리 해리스(Barry Harris)의 네덜란드 덴하그 음악원(Royal Conservatoire The Hague) 강의 영상은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기록물인데, 그는 학생들을 세워 놓고 “너희는 전혀 스윙을 하고 있지 않아. 스스로 스윙을 해 봐.”라고 가르친다. 스윙은 대체 뭐란 말인가. 스윙의 방법은 또 무엇인가. 듣기만 해서는 절대 체득할 수 없으리라. 재즈의 스윙처럼 시각적 여백 개념 역시 실무자·실연자·실현자가 아닌 이상 온전히 깨치기는 쉽지 않은 경지가 아닐까 싶다.


디자이너도 아닌 데다 디자인 비전공자인 자가 겨우 이해한 수준이란 이런 것이다. 앞서 잠깐 썼듯이 시각 디자인은 동양화보다는 서양화의 여백 양식에 더 맞닿아 있다는 것.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한 데에는 아래와 같은 참고 문헌의 영향이 컸다.


서양 유화의 경우 화면을 빈틈없이 채운다. 심지어 엑스선 투사를 통해 보면 현재의 빈 공간(사실 유화에는 빈 공간도 물감으로 꽉 차 있다) 속에 화가가 초고에서 그렸던 다른 인물이나 소재가 드러나기도 한다. 유화의 경우 이처럼 여백까지도 철저하게 계산된 공간이다. 그런데 동양화에서는 왜 여백을 중요시하고 화면에 그리지 않은 곳을 많이 남겨두는가? 이 문제는 노장철학, 불교철학 등 심오한 정신적 깨달음과도 관련이 있으나, 단순히 그림에 국한시켜 말해본다면 화가가 자신이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유로워진 깨달음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준현, 「우리 옛 그림 속의 여백 - 적막한 이념의 공간과 살아 숨 쉬는 현실의 공간」, 문화재청 홈페이지, 2012. 7. 12.


동양화와 서양화(서양 유화)에서 나타나는 여백의 차이를 해설한 글이다. 요약하면 전자는 정신적 차원의 표현에 따른 것이고, 후자는 “철저하게 계산된 공간”이라는 설명이다. “빈 공간도 물감으로 꽉 차 있다”는 대목은 두고두고 곱씹게 된다.


시각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실무적 차원에서 다뤄 본 적은 없지만 디자인 회사에 근무한 덕으로 동료 디자이너들의 작업 현장을 곁에서 볼 기회가 종종 있었다. 글 쓰고 편집하는 에디터의 작업 환경과 가장 큰 차이라면, 숱한 ‘단위 기호’들과 함께한다는 점이었다. 서체 디자이너만 해도 포인트(point), 파이카(pica), 엠(em), 유니트(unit) 등 글자 크기를 재는 다양한 단위들 없이는 작업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픽 디자이너의 어도비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는 프레임과 레이아웃, 그 안에 배치되는 이미지 규격 및 배율을 실시간으로 표시해 준다. 그런 수치들을 측량해 가며 형태를, 공간을, 하나의 큰 이미지를 설계해 내는 일이 곧 디자인이다. 정신계에서의 여백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아 가볍고 넉넉한 것일 수 있겠으나, 물리적 시각 세계의 여백이란 한마디로 의도되고 측정된 공백이다. 그러니 디자이너의 설계대로 무거워지기도 가벼워지기도 하는 계산 값이 나오는 것이리라. 이런 일을 날마다 하는 작업자들 틈에서 근무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의 글쓰기는 어떠한가’ 하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체 ‘새봄체’를 제작한 디자이너 이새봄은 “폰트 디자이너는 정사각형 판 위에서, 또는 그것을 1,000개/1,024개/2,048개로 쪼갠 그리드 위에서 글자 하나씩을 만들어간다.”(「이새봄의 미미와 소소 #시작하며」, 『타이포그래피 서울』, 2021. 2. 3.)라고 했는데, 나는 나의 글을 얼마나 쪼개 가며 깊이 쓰고 있는가. 나는 한 번이라도 누군가의 빈 공간에 가득 채워진 물감을 인지해 본 적이 있던가⋯⋯. 여백은 역시 무거운 것이다.


― 책 소개(도서 콘셉트, 분량, 차례, 작업 일정 등): 바로 가기

― 다음 연재: 2024년 1월 28일 일요일 세 번째 챕터가 연재됩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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