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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Jan 26. 2024

채워진 비어 있음 ①

여백은 어떻게 ‘미’가 되는가


여백은 예술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 개념이다. ‘여백의 미’라는 관용구가 증명하듯 예술에서의 여백은 미학적 요소로 다루어지고는 한다. 한국 현대문학을 예로 들자면 이른바 ‘여백의 시인’이라 불린 인물이 존재한다. 김종삼(1921~1984)이다. 동갑내기 시인 김수영과 더불어 1950년대 모더니즘 시문학을 견인한 문인으로 평가 받는다. 2020년 서울 종로 교보생명 사옥의 광화문글판에 김종삼의 시 「어부」—시의 마지막 세 행인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 사노라면 / 많은 기쁨이 있다고’라는 구절이 선정되었다.—가 게시되면서 다시금 그 이름이 회자된 바 있다. 80년대생 시인 황인찬은 월간지 『지큐 코리아』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대선배 김종삼을 이렇게 평했다.


김종삼은 한국 시 문학사에서 가장 탁월하게 침묵과 여백을 다루는 시인이었다. 나는 시가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그의 시를 통해 배웠다. 시가 침묵을 통해 보다 진실한 것을, 더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그의 시를 통해 배웠다. 이를테면 이런 시.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 가난한 아희에게 온 / 서양 나라에서 온 /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 진눈깨비처럼

― 「북치는 소년」


이 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서술어는커녕 주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부사로만 성립하는 시. 다른 시인들의 시 가운데 이보다 말수 적은 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 침묵과 여백을 잘 다루는 시는 나로서는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황인찬, 「시인 황인찬이 말하는 이유」, 『지큐 코리아』 2019년 4월호


위 인용문은 문학에서의 여백 개념을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침묵”이라는 낱말이 그것인데,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서술어는커녕 주어조차 존재하지 않는” “말수 적은” 시 쓰기, 즉 침묵하기를 통해 김종삼 시의 여백 미학이 완성된다고 위 글은 소개하고 있다. 침묵을 글짓기 기술의 한 방법으로 본다면, 여백은 그로써 성립되는 창의적 구조물인 셈이다. 관념적 수사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문학의 여백’에 다소나마 구체성을 부여해 주었다는 점에서 황인찬의 글은 귀중하다. 여백 개념을 이해하는 데 유의미한 참고 문헌이다. 그가 해설한 “침묵과 여백” 기법은 비단 시뿐만 아니라 소설에서도 적용될 만한 쓰기 양식이다. 2010년대 이후 출간된 장편소설 중 『아침 그리고 저녁』(욘 포세, 2019), 『태고의 시간들』(올가 토카르추크, 2019), 『맡겨진 소녀』(클레어 키건, 2023) 같은 작품들을 ‘침묵과 여백 계열’로 한데 묶어 소개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다.


텍스트 콘텐츠란 기본적으로 지면 혹은 디지털 화면에 줄글이 채워지는 형태를 취한다. 그렇다 보니 시각적으로든 심미적으로든 여백 감각의 체험이 직관적으로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나마 시는 소설이나 산문에 비해 글자수가 적어 언뜻 보기에 여백미가 느껴지기도 하겠으나, 상징과 함축으로 꽁꽁 싸매진 시어들을 하나하나 풀어헤쳐 읽어 나가다 보면 머릿속이 온통 꽉 차고 마는 읽기 경험을 하게 마련이다. 이와 달리 미술과 음악에서의 여백 감각 체험은 비교적 직관적이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 전통 회화를 위시한 동양화, 에드워드 호퍼 같은 현대 서양화가의 작품을 접하다 보면 여백의 공간감이 확실하게 인지되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글쓰기(시 쓰기)에서의 “침묵”이 “여백”을 구현하는 작법이라면, 그림에서는 ‘비워두기’라는 화풍이 여백 성립의 요건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의 여백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아래의 글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다른 연주자들이 멋진 화음을 연주할 때 멍크는 약간의 정적을 넣었다가 갑자기 의도를 알 수 없는 불협화음을 연주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멍크의 화음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어려워했고, 몇몇은 멍크가 음악을 해석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중략)


듀크 엘링턴과 마찬가지로, 멍크는 여백과 정적을 동시대 음악가들과 다르게 활용했다. 다른 음악가들은 합주에서 정적이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비슷한 코드를 반복해 즉흥연주로 여백을 채운다. 멍크에게 정적이란 음악적 상상력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었다.


론 브랜튼, 「여백마저 ‘재즈적 상상력’이 된 셀로니어스 멍크의 세계」, 한국경제신문, 2023. 6. 27.


전설적인 재즈 피아니스트 셀로니어스 멍크(Thelonious Monk)에게 헌정하는 후배 음악가(필자인 론 브랜튼 또한 재즈 피아니스트다.)의 평론이다. 문학의 “침묵”과 조응하는 음악의 기법으로 위 글은 “정적”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정적만이 음악적 여백을 보증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 『잡문집』에 「여백이 있는 음악은 싫증나지 않는다」라는 글이 실려 있는데, 진지한 음악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법한 제목이다. 이 글은 “여백이 있는 음악”에 관하여 실증적인 규명을 하는 대신에 하루키 자신의 청감(聽感)이 ‘음악적 여백’으로 받아들인 몇몇 곡과 음악가들에 대한 단상을 소묘하고 있다. 짐작건대 그가 감각한 음악적 여백이란, 소리를 아예 소거하는 정적이 아니라 ‘꽉 채워지지 않은’ 형태로 음을 지속한다는 의미하는 듯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예로 들면 머라이어 캐리의 휘황한 ‘올 아이 원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보다는 빙 크로스비가 나긋한 음색으로 부른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선호하는 식이랄까. 전자는 빠른 템포에 연주되는 악기와 멜로디도 풍성한 반면, 후자는 한겨울 눈석임(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 스러짐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같이 천천하고 세션 구성 또한 소박하다.


여백 개념에 대한 이상의 인식은 과연 시각 디자인 분야에서도 유효할까. 디자인 행위로 침묵, 정적, 남겨 둠, 비워 둠을 구현할 수 있을까. 솔직히 고백하자면 답을 못 찾았다. 사실 잘 모르겠다. 디자인 작업물에서 문학적 침묵, 회화적 공(空), 음악적 정적 또는 꽉 채워지지 않음에 준하는 인상을 받아 본 적은 아직까지 없다. 그렇다고 디자인이 여백을 허하지 않는 것인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 「채워진 비어 있음 ②」로 이어집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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