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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Jan 21. 2024

 디자인 = 설계 = 反추상 ②

“디자인이 예술‘적’이기는 하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상담사 역할을 자처한 이는 당시 1인 스튜디오 사업자 등록을 막 마치고 프리랜스 그래픽 디자이너로 발돋움한 동년배였다. 이탈리아 태생의 전설적 디자이너 마시모 비넬리(Massimo Vignelli)를 존경하고, 〈개인사업자를 위한 세금 공부〉 같은 회계 관련 온라인 강의를 수강 중이던 친구였다. ‘디자인은 과연 예술인가’ 같은 뜬구름 잡는 대화 주제에 시간을 낼 여력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친히 동종 업계 동갑내기 신입을 만나 주고 장시간 귀를 기울여 주기까지 했다. 상담자는 조심스레 난마를 내놓았는데 상담사는 대뜸 쾌도를 꺼내 휘둘렀다. “디자인이 예술‘적’이기는 하지.” 이것이 그의 첫마디였다.


“중국에 뤼징런(呂敬人)이라는 유명한 북 디자이너 선생이 계셔. 중국인들이 그분을 뭐라고 부르게? 서적설계사(書籍設計師). 우리나라는 영단어를 그대로 독음해서 ‘디자인’이라 부르는 게 통상적인데, 중국은 굳이 뜻풀이 낱말을 겸용하더라고. 중국에서 디자인은 보통 한자어 ‘設計(설계)’로 표기해. 설계가 뭐냐? 계획대로, 기획안대로, 도면대로 구조화하는 거잖아. 여기에 추상성 같은 개념은 개입할 수가 없어. 불가능해. 너 생각해 봐라. 건물을 추상화 그리듯 시 쓰듯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지으면 어떻게 될까? 바람결에 와르르 무너지지 않겠어? 그물에 걸려야 해. 그게 설계고 디자인이야. 나는 그렇게 본다. 마시모 비넬리가 1972년도에 작업한 뉴욕 지하철 노선 안내 시스템 알지? 얼마나 예술적이야. 그렇다고 그 작업이 예술인가 하면 결코 아니라는 거지. 그건 예술적 설계야. 추상적으로 그린 지도가 아니라, 계산하고 조사하고 측정해서 설계한 아름다운 시각 구조물이라고.”


오래전이기는 해도 여전히 그 디자이너 친구의 말을 복기할 수 있다. 그만큼 인상적이었고 납득할 만했다. ‘디자인 = 설계’라는 명쾌한 도식, 여기에 ‘따라서 추상성은 성립 불가’라는 종속절까지 더해지니 마치 개안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에이, 그건 아니지.’ 하고 반박할 여지를 찾지 못했고 지금도 그렇다. 대화 종료 후 스마트폰 사전 애플리케이션으로 ‘추상적’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결과값을 확인한 뒤 더더욱 친구의 ‘디자인론’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추상적 抽象的]

1. 명사 / 어떤 사물이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

2. 명사 / 구체성이 없이 사실이나 현실에서 멀어져 막연하고 일반적인. 또는 그런 것.

3. 관형사 / 어떤 사물이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고 있지 않은.

4. 관형사 / 구체성이 없이 사실이나 현실에서 멀어져 막연하고 일반적인.


어떤 창작물이 추상적이라고 해서 무조건 예술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나, 추상성을 표방한 창작물이 예술 작품으로 인정되는 일은 성립할 수 있다. 반면에 디자인은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위 사전적 정의의 첫 번째 항목처럼 “직접 경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은 디자인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디자인 이론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사용자 경험’이란 요컨대 추상성의 반의어인 셈이다.


디자인이라는 생경한 분야를 이해해 보려는 인식 체계에 ‘디자인 = 설계 = 추상성을 제거하다.’라는 등식이 추가된 직후부터였던 것 같다. 디자인과 글쓰기, 두 창작 행위 각각의 작동 기제를 머릿속으로 등가 교환하는 식으로 ‘디자인 글쓰기’ 연습을 해 보기로 마음먹은 시점 말이다. 사용자(수용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인 독해 행위, 즉 해석과 사유를 발동시키는 모든 대상을 텍스트라 이른다면 디자인과 글쓰기는 동일 선상에 배치되기 충분하다. 제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자칭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실속 없는 야심가일 가능성이 농후하겠지만)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글을 짓는다 한들, 어쨌거나 글쓰기 또한 설계의 영역을 벗어나서는 완연하기 어렵다. 기행문, 논설문, 소고, 소설, 수필, 서간, 시, 아포리즘, 평론, 회고록, 희곡 등 다부문의 텍스트 콘텐츠 모두 ‘개요 짜기’라 일컬어지는 설계 단계를 거쳐서 집필된다. 설계의 기예를 충분히 손과 뇌에 익힌 뒤여야만 변주와 탈주로의 ‘예술 행위’도 내실을 인정 받지 않겠나.


무협 소설 『의천도룡기』의 대사부 장삼봉은 제자 장무기에게 비기(祕記)의 무공을 전수하면서 끊임없이 질문한다. 얼마나 잊었느냐, 많이 잊었느냐, 이만 하면 다 잊었느냐. 애써 가르친 바를 제자가 산만히 흘려넘기기를 바라서 거듭 잊었는지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만큼 잘 배웠는지를 검수하는 절차이면서, 그 모든 학습 내용을 초탈해 자유자재로 초식을 펼칠 정도로 발전했는지를 검증하는 교육 방침이다. 스승 나름의 애제자 설계 방식이리라. 글쓰기가 되었든 디자인이 되었든, 창작 행위와 사회 생활에서의 성장도 다 설계대로 이루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 설계 도면을 그리든 선구자의 믿을 만한 설계를 따르든.


이상, 첫 번째 챕터에서 서술한 바가 이 책 전반을 아우르는 ‘디자인-글쓰기 세계관’이다. 디자인 혹은 설계의 관점으로 글쓰기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이런 관점을 지닌 저자가 주요하다고 판단한 몇 가지 ‘디자인 문법’에 대한 해제를 다음 챕터부터 이어 가도록 한다.


― 책 소개(도서 콘셉트, 분량, 차례, 작업 일정 등): 바로 가기

― 다음 연재: 2024년 1월 27일 토요일 두 번째 챕터가 연재됩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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