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예술인가? 디자이너는 예술가인가?
‘디자인은 예술인가? 디자이너는 예술가인가?’ 디자인 업계에 갓 취직했을 때 오랫동안 씨름했던 질문이다. 출신이 문예창작이고 공부하며 접했던 콘텐츠가 대개 예술 카테고리에 속했던 탓인지, 입사 초에는 디자인이라는 직무와 디자이너라는 종사자들을 예술 분야로 포함시켜 이해하려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 몇몇 디자인 매체의 기사나 칼럼에서 그래픽 디자이너, 서체 디자이너 등을 언급할 때 ‘작가’라는 호칭이 심심찮게 쓰이기도 했던 터였다. 생소한 업계를 공부하느라 이런저런 레퍼런스를 그저 닥치는 대로 흡수하기 바빴던 신입 사원의 뇌 안에는 ‘디자인은 예술, 디자이너는 예술가’라는 인식 체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일을 해 나가다 보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사제지간으로, 혹은 선후배 사이로 관계 맺었던 시인·소설가·극작가 같은 예술가들과 디자이너 집단은 확연히 달랐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문인들 쪽이 이른바 ‘자유로운 영혼’ 유형에 가까웠다고 할까. 시 쓰기, 소설 쓰기, 희곡 쓰기 등 모든 문예창작 분과에는 엄연한 양식이 존재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시 창작, 소설 창작, 희곡 창작 수업이 진행된다. 그런데 이 모든 글쓰기 양식을 뛰어넘는 변주를 인정하고 적극 수용한다. 예를 들어 소설의 세 가지 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준수하지 않는 작품들이 실재한다.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일반적 대립 구조도 없고, 심지어 주인공이라 특정할 만한 인물도 불분명하며, 이렇다 할 사건 발생과 클라이맥스나 대단원도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가 하면, 시대나 연대가 모호하게 묘사되기도 한다. 이 사례의 제일선에 서 있는 국내 작가를 꼽자면 단연 소설가 정영문일 것이다. 한 언론 매체는 그의 작품 경향에 대하여 “기승전결 없는 의식적 중얼거림”(「‘할 말 없음’을 말하는 남자」, 조선일보, 2017. 3. 13.)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순으로 구조화되는 전통적 소설 서사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정영문의 작품이 몹시 난해하게 다가올 것이다. 음악에 비유하면 쇤베르크의 무조(無調) 기법 악곡, 존 케이지의 이른바 ‘연주하지 않는 연주곡’인 〈4분 33초〉를 처음 마주하는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선 하나당 글 한 줄을 쓴다’라는 암묵적 규칙이 내재된 유선 노트를 펼쳐 놓고, 선 두세 개에 걸쳐 큼지막하게 글씨를 써 나가거나 가로로 그어진 선들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필기를 한다거나. 이처럼 양식으로부터의 변주와 탈주가 허용 혹은 권장되는 것. 그것이 예술 작품과 예술 작품 아닌 것을 가르는 구분점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예술관이 이렇다 보니, 디자인 매체 에디터로서 첫해를 보내는 내내 ‘디자인은 예술인가? 디자이너는 예술가인가?’라는 질문을 나름대로 꽤 진지하게 숙고했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와 마주하는 대상을 명확히 정의 내리고 싶어하던, 그리하여 적확한 텍스트 콘텐츠를 기획·생산하고자 했던 초심자의 내적 갈등이었던 셈이다.
― 「디자인하다 = 설계하다 = 추상을 제거하다 ②」로 이어집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