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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Jan 28. 2024

실존(그리드)은 본질(콘텐츠)에 앞선다 ①

글 쓰는 에디터와 글 깎는 디자이너


이번 장의 제목은 철학자이자 작가이며 노벨상 거부자(196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목되었으나 사르트르 스스로 상을 거부했다.)이기도 한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뜻풀이는 아래와 같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 먼저 실존하고,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며, 세계 안에 불쑥 나타나 나중에 정의되는 것을 뜻한다.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이희영 옮김,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동서문화사, 2017, 29쪽


‘뜻한다’라는 종결어미가 무색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아마도 이러한 독자들을 배려한 듯 사르트르는 비유를 들어 재차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실제로 그는 철학적 사상가이면서 숱한 문학 작품을 집필한 작가답게 본인 저서에 갖가지 메타포를 즐겨 쓴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려야 할 일정한 그림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화가는 자기 그림의 구성 안에 자기를 집어넣는 것이며, 그려야 할 그림이란 바로 그가 다 그린 그림이다.


위의 책, 47쪽


그림 그리기 행위는 화가라는 직업의 본질이다. 화가를 직업으로 가진 이들은 누구나 그림을 그린다. 수많은 ‘직업으로서의 화가들’은 “자기 그림의 구성 안에 자기를 집어넣는“ 차원의 헌신 내지는 분투를 통해 ‘수많은-누구나’의 바깥으로 나아가 단독한 주체성을 획득하고, 그로써 화가 자체로, 즉 실존(사전적 정의는 ‘개별자로서 자기의 존재를 자각적으로 물으면서 존재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상태’다.)으로 거듭난다. 요컨대 화가의 화가다움을 보증하는 것은 “그려야 할 일정한 그림”을 작업하는 일이 아니라 “다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다. 누구나 다 그리는 일정한 방식의 그림만 그린다면 수많은-누구나의 바깥으로 향하지 못한다. 즉, 실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그려야 할 일정한 그림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라고 딱 잘라 말한 게 아닐까. 중요한 건 오직 “다 그린 그림”일 뿐.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곰곰 곱씹을수록 현실적이고 실무적인 제언이다. 디자이너든 작가든 각자의 영역에서 결과(성과)로 평가 받는다. 동종 업계 종사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행할 디자인과 글쓰기라는 직업적 본질보다 앞서는 것은 역시나 그들의 실존이다. 개별자로서 그들은 어떤 디자이너·작가로 업계에 소개되고 거론되는가, 그들의 어떤 면모가 그들을 수많은-누구나의 바깥에 위치하도록 근거하는가, ⋯⋯.


회사에서 갑작스럽게 종이 잡지 편집 일을 맡고 편집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게 되면서부터 엉뚱하게도 사르트르를 떠올렸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개념이 편집 디자인 영역에도 충분히 적용되는 것 같아서였다. ‘다 그려진 그리드 안에 텍스트를 배치하기.’ 이것이 편집 디자인이라는 작업에 대하여 내려 본 설익은 정의였다. 문창과 전공자로서 책의 본질은 뭐니 뭐니 해도 텍스트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책 만드는 작업에 참여해 보니, 텍스트보다 ‘그리드’라는 존재가 앞서는 사례를 여러 차례 목격했다. 당시에는 그리드라는 용어조차 낯설었다. 텍스트가 본질이 맞기는 한데, 그보다 앞서는 그리드라는 실존을 처음 경험한 것이다. ‘이겨 놓고 싸운다’는 군인들의 구호를 빌리자면, 편집 디자인은 마치 책을 ‘완성해 놓고(그리드를 다 그려 놓고) 만드는(텍스트를 채우는)’ 일 같았다고 할까.


근무처였던 폰트 회사가 자체 발행 간행물인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의 혁신호를 내겠다 공언하면서 급하게 편집진을 꾸렸다. 사내 온라인 매체 에디터가 종이 잡지 에디터로, 편집 디자인 소프트웨어(어도비 인디자인)를 다룰 줄 아는 프리랜스 그래픽 디자이너가 편집 디자이너 역할로 영입되었다. 취재하고 글을 쓰고 칼럼니스트들을 섭외하고 그들의 원고를 교정·교열하고, 편집장에게 검수를 받고, ⋯⋯. 여기까지는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이나 대동소이했다. 잡지에 게재할 모든 텍스트와 도판, 그러니까 ‘콘텐츠’ 작업이 완료되고 나서야 문제의 사르트르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철야 근무 중이던 새벽, 편집 디자이너가 다급하게 잠깐 자기 자리로 와 보라고 불렀다. 회사에 여분의 아이맥이나 모니터가 없었는지, 디자이너는 자신의 13인치 맥북 프로를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어깨와 목을 잔뜩 구부린 자세로 앉아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갖가지 선분과 프레임 안에 들어찬 글줄과 이미지들이 연신 확대·축소될 때마다 안구에 통증이 느껴졌다. 이윽고 디자이너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보이시죠. 에디터 님이 아까 보내 준 전시 리뷰 기사거든요. 텍스트를 좀 깎아야 할 것 같아요. 그리드에서 삐져나오는 거, 요기 요기, 보이시죠. 한 50자 정도만 줄이면 적당하겠는데. 이거 지금 좀 빨리 부탁 드릴게요.”


― 「실존(그리드)은 본질(콘텐츠)에 앞선다 ②」로 이어집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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