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갈 집의 평수를 미리 파악”하는 글쓰기
텍스트를 ‘깎는다’라는 표현도 처음 들었거니와 ‘그리드’라는 낱말도 생소했다. 텍스트 분량을 줄여 달라는 요청인 것은 알겠는데, 해당 작업을 “지금 좀 빨리” 진행해야 하는 이유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리드에서 삐져나오는” 것이 원인이라면 디자이너가 그 ‘그리드’라는 걸 알아서 조정하면 될 일 아닌가. 당시에는 진짜로 이렇게 생각했다. 문창과 전공자 특유(라고 표현해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의 텍스트 중심주의, 콘텐츠 우선주의가 발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그날 그 심야, 디자이너의 시각적 실존(?)이 금방이라도 풀썩 쓰러질 듯한 형상이었기에 군말 않고 작업 요청에 응했다.
50자를 덜어 낸 원고 파일을 보낸 지 십여 분이 지났을 때 다시 디자이너의 부름을 받았다. 대여섯 자만 덜면 딱 알맞겠으니 지금 즉석에서 글자 수를 줄여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미 퇴근한 지 오래인 직원 자리에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어떤 부분을 삭제해야 글이 어색해지지 않을까 곰곰 고민하면서 맥북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사이 디자이너는 옆으로 비껴 앉아 자울자울 흔들거렸다. 사무용 의자의 끽끽거림과 편집 디자이너의 숨기척을 들으며, 그리드에서 삐져나온 대여섯 자 분량의 텍스트를 숨죽여 깎던 한밤의 사무실⋯⋯.
그 새벽 작업한 혁신호 이후 혁신 2호, 혁신 3호 작업에 연달아 참여했다. 글자는 늘 그리드를 뚫고 나왔고, 편집 디자이너와의 ‘심야 텍스트 깎기’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런 경험을 하다 보니 시나브로 글쓰기에 대한 기존의 태도를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텍스트 중심주의 및 콘텐츠 우선주의 무용론 쪽으로 서서히 옮겨 간 것이다. 전면적인 입장 선회는 아니고 가치관의 유동성이라 이르는 편이 적절할 듯하다. 편집과 출판 협업 없이 독야청청 혼자만의 글쓰기를 지속할 마음은 없었으므로, 직업적으로 글을 써 나가야 할 인간으로서 적당히 유연해지기로 작정했다는 얘기다.
잡지 작업을 계기로 그리드에 관한 책 몇 권을 추천 받아 읽기도 하며 나름대로 이해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완연히 체득할 리는 만무하다. 앞 장의 주제였던 시각적 여백만큼이나 디자인 행위의 그리드 개념은 실무 차원의 실습과 응용을 병행하지 않는 한 제대로 익히기 불가능할 것이다. 배리 해리스가 음악원 학생들에게 일갈한 ‘스스로 스윙하는’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꾸준히 글을 쓰고 디자이너와 공조해야 하는 직업인으로서 스윙을 청취하고 감상하는 정도는 충분히 지속 가능한 일이다.
『뽀빠이』 매거진의 대표 편집자였다는 츠즈키 쿄이치는 자신의 저서 『권외편집자』에서 디자인에 맞춰 하는 글쓰기가 끔찍하다고 발언했지만 나는 철저히 그에 반대하여, 텍스트가 들어갈 위치와 분량을 미리 정해두고, 제한된 상황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작성한다. 이것은 마치 이사 갈 집의 평수를 미리 파악하고 거기에 맞춰 살림살이를 계획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무턱대고 모든 짐을 바리바리 싸서 입주한 뒤 감당하기 힘든 상태의 무질서를 마주하기보다는 이사 갈 집의 도면을 미리 파악하고 가구가 들어갈 자리까지 미리 짜두는 셈이다.
오혜진, 「16페이지 글쓰기에 관해 글쓰기」, 『Designed Matter: 디자인된 문제들』, 고트, 2022, 54~55쪽
『Designed Matter: 디자인된 문제들』은 이기준, 김동신, 오혜진, 이지원, 박럭키, 이지현, 정동규, 정재완, 김의래, 신인아 등 현업 디자이너 및 디자인 교육가로 활동 중인 10인의 공저다. 제목인 ‘디자인드 매터(Designed Matter)’는 본래 ‘디자인 작업물’을 의미하는 영어 표현인데, 여기에 이 책은 ‘디자인된(designed) 문제들(matters)’이라는 중의적 직역을 부제로 달았다. 말 그대로 ‘디자인된 디자인 작업물들’에 관한 공저자 열 사람의 비평적 성격을 띤 산문집이다. 디자인 비전공자가 디자이너의 디자인 행위를 실무적 차원으로 이해하는 데 이만 한 참고서가 없었다. 2022년이 아니라 2011년이나 2012년쯤 출간되었다면 회사 생활이 좀더 수월했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상상도 해 본다. 수록된 에세이 열 편 모두가 유익했지만 그중에서도 그래픽 디자이너 오혜진의 글은, 현재 독자들이 열독 중일 이 책이 표방하는 ‘디자인으로 배운 글쓰기’ 내지 ‘디자인-글쓰기’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16페이지 글쓰기에 관해 글쓰기」를 읽고 나서야 그리드의 기능을 제법 선명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본문의 ‘이사 준비’ 메타포와 “무질서”라는 낱말 덕분이다. 그리드란 시각적 질서를 위한 일종의 안전선. 이 진리(!)를 오혜진은 실효적인 데다 직관적이기까지 한 글솜씨로 디자인 비전공자의 머릿속에 각인시켜 주었다. 오혜진이 거론한 츠즈키 쿄이치의 입장이 다름 아닌 텍스트 중심주의, 콘텐츠 우선주의에 해당할 텐데, “나는 철저히 그에 반대하여” 글을 쓴다는 그녀의 디자인-글쓰기 지론에 적극 찬동한다. 그리드는 디자인 세계의 보이지 않는 안전선이자 안내선, 구획선, 주차선이고, 그 선을 준수하지 않는 행위는 시각적 질서 교란이다. 제아무리 저명한 작가라 해도 디자인의 세계에 제 텍스트를 이주시키려면 시행령을 따라야 한다. 글 쓰고 책 내려는 작가들이 그리드 개념을 이해하려 노력하기를 바란다. 디자이너를 이겨먹으려고 하거나 선을 넘는 언사—‘당신이 글에 대해 뭘 알아?’라고 해석될 소지가 다분한 말을 편집 디자이너 면전에다 내뱉는 인물을 실제로 본 적이 있다.—를 삼갈 것을 고한다. 당신의 본질(텍스트)은 실존(그리드)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면 깎인다.
― 책 소개(도서 콘셉트, 분량, 차례, 작업 일정 등): 바로 가기
― 다음 연재: 2024년 2월 3일 토요일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