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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Jan 29. 2024

글을 쓰다, 글을 놓다 ①

타이포그래피라는 형용사


네 번째 장에서 이야기해 볼 주제는 타이포그래피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용어를 ‘활판으로 하는 인쇄술’, ‘편집 디자인에서 활자의 서체나 글자 배치 따위를 구성하고 표현하는 일’이라 정의한다.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가 2012년 편찬한 『타이포그래피 사전』에서는 ‘글자 형태를 다루거나 글자로 사용하여 디자인하는 기술과 그 표현’이라 풀이되어 있다. 읽고 쓰는 대상으로서의 글만을 접하고 배워 온 사람에게 타이포그래피는 난해한 미분 방정식처럼 여겨졌다. 글을, 그리고 글자(문자)를 점·선·면처럼 시각적 구성 요소로 바라보는 디자인의 세계관이 자못 가탈스러웠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로서 바람직한 자질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평소 의문을 가졌거나 한참 궁리했던 사안을 인터뷰 자리를 기회 삼아 디자이너들에게 물어볼 때가 잦았다. 수강생이 강사에게 질의하듯 ‘이건 무엇인가요?’ 하는 투로 대놓고 묻자니 너무 얄팍한 짓 같아서 나름대로 질문의 요령을 설계(!)했다. 답을 구하고자 하는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작업물을 매개체로 설정하여 그것에 관한 디자인 과정을 들려달라고 청하는 방식이다. 아래는 타이포그래피를 주제로 한 인터뷰이와의 문답 내용이다.


인터뷰어. “『설국』으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1954년작 『명인』이 지난해 국내에 출간됐죠. 이 책의 디자인을 매뉴얼에서 진행했고요. 소설의 줄거리를 떠나 제겐 이 책이 퍽 신선했습니다. 한 페이지의 1/4쯤 되는 하단 영역을 텅 비워둔 점, 그 공간에 이따금 본문 각주를 세로쓰기로 처리한 점이 눈에 띄더군요.

이 작품이 바둑 소설이잖아요. 본문 텍스트의 여백과 가로쓰기/세로쓰기 대비 때문인지 본문 페이지 자체가 마치 기보(棋譜)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활자들이 마치 가로줄/세로줄에 놓인 바둑돌들 같았다고 할까요. 물론 제멋대로의 해석입니다⋯. 『명인』의 디자인 콘셉트에 대한 해제를 부탁드립니다.”


인터뷰이. “『명인』 북 디자인은 저희 팀 한승희 디자이너의 작업입니다. 시안이 두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를 보자마자 ‘이걸로 해야겠다.’ 강하게 느낌이 왔어요. (중략) 책이 바둑에 관한 내용이라 기보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바둑 명인의 노련미, 정교함 등을 담고자 했어요. 가장 좋았던 부분은 페이지 하단을 비워 낸 레이아웃입니다. 은퇴 대국을 대하는 명인의 기분은 어떨까 생각했을 때 제가 해석한 것은 공허함이었거든요. 바둑이 뭐라고 내 인생을 여기에 담았을까, 명인이라 칭송받지만 내가 그만큼 위대한 사람일까, 이 대국이 끝나면 나는 무엇일까, ⋯⋯. 이런 공허함을 레이아웃과 연결시켜 달라고 디자이너에게 주문했죠. 글자들 아래 공간이 공허히 비어 있도록, 독자들도 명인의 공허함을 함께 읽어 나갈 수 있도록요.”


인터뷰/애프터뷰 #8 ‘매뉴얼 그래픽스’ 이성균」, 『타이포그래피 서울』, 2020. 3. 11.


인터뷰 내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소설 『명인』은 노년의 바둑기사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온 힘을 다한 은퇴 대국[작품에서는 바둑 기(棋) 자를 써서 ‘은퇴기’라 표현한다.] 과정을 그렸다. 이 소설책의 북 디자인 작업을 총괄한 디렉터 이성균은 “기보”와 “공허함”을 타이포그래피 아이덴티티로 정하여 지면을 가꾸었다고 설명했다. 질문자가 언급한 “본문 텍스트의 여백과 가로쓰기/세로쓰기 대비”는 그러한 맥락 하에 설계된 결과물이다.


“나는 좋은 타이포그래피의 최종적인 목적은 가독성이 아닌 아름다움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우아함, 쾌활함, 고요함 등의 많은 형용사를 포괄한다.”


요스트 호훌리 지음, 김형진 옮김, 『마이크로 타이포그래피』, 워크룸프레스, 2015, 77쪽


『명인』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디자이너 이성균의 발언을 위 인용문의 구체적 사례 내지는 주석으로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스트 호훌리가 이야기한 “형용사”와 소설책 『명인』의 타이포그래피적 “공허함”이 적확하게 조응하므로.


글쓰기 행위에서도 타이포그래피가 성립할까. 글쓴이 스스로 자신의 텍스트를 타이포그래피적으로 다루는 일은 일어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두 가지 작업의 실현 가능성을 묻는다. 첫째는 작가가 직접 자기 글의 디자이너 또는 타이포그래퍼로 나서는 일이고, 둘째는 타이포그래피를 하듯—단지 줄글을 써 나가는 데 그치지 않고 단어, 어절, 문장, 문단을 기술적으로 배치하여 특정한 형용사적 무드를 생성해 내며—집필해 보는 일이다.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는 내내, 승려가 화두를 붙잡고 참선 수행을 하듯 자문자답하는 양으로 ‘타이포그래피적 글쓰기’에 관하여 이 방향 저 방향으로 궁리를 했던 것 같다. 질문의 답을 찾았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으나 적어도 유의미한 사례는 발견했다. 앞에서 열거한 두 가지 작업의 실례를 실무 과정에서 배울 수 있었다.


― 「글을 쓰다, 글을 놓다 ②」로 이어집니다.

― 연재 일정을 기존의 ‘매주 토요일/일요일’에서 ‘매일’로 변경하였습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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