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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Jan 29. 2024

글을 쓰다, 글을 놓다 ②

타이포그래피적 글쓰기의 가능성


회사에서 약 3년간 종이 잡지 편집 일을 하는 동안 위의 첫 번째 사례, 즉 작가가 제 글을 손수 디자인한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편집 디자이너와 밤을 새며 그리드 개념의 실체를 맞닥뜨렸던 혁신호 작업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혁신 2호 작업을 시작했다. 해당 호의 특집 주제가 마침맞게 ‘문자의 이미지성’으로 정해졌다. 일반적으로 가독(readability)의 영역 안에 기거하는 문자와 텍스트를 현시(showability)의 측면에서 집중 조명해 보자는 것이 기획 의도였다. 특집 섹션 구성을 위하여 디자이너뿐 아니라 미학자와 서예 연구가 등 다분야의 전문가들을 좌담 패널 및 필자로 섭외했는데, 그중 문창과 전공자의 눈에 들어온 원고 한 편이 있었다. 19세기 말 상징주의 시 경향을 창시했다고 평가되는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에 대한 긴 산문이자 일종의 소론이었다. 대학 시절 전공 과목에 문예 사조 강의가 교수요목으로 포함되었던 덕으로, 졸업한 지 20년이나 지났음에도 ‘프랑스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라는 존재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비문학 분야인 디자인 업계에서 일하다 우연찮게 말라르메의 이름을 목도하니 반갑기까지 했다. ‘그래, 난 문창과였어.’ 하는 괜한 치기가 일기도 했고, 문학과 디자인이 아예 무관계한 영역은 아니겠다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해 보았다.


글쓴이는 프랑스 국립대학교인 파리7대학에서 말라르메 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도윤정 교수(인하대학교 프런티어학부대학). 말라르메가 화가 에두아르 마네와 공동 제작한 예술가책(livre d’artiste) 『까마귀』와 『목신의 오후』를 시각 디자인 원리로 해설했다. 여기서 예술가책이란 1830년대 판화 기술의 발달로 태동한 삽화책(livre illustré)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북 아트(book art)라 번역되기도 한다. 아래 인용문은 『까마귀』에 대한 도윤정의 기술 일부다.


이 책에서 문자의 시각성과 관련하여 눈여겨봐야 할 것은 로만체/이탤릭체라는 서로 대비되는 활자체의 교차 사용이다. 왼쪽 페이지에 놓여 있는 영어 원문은 로만체로 인쇄하였고 오른쪽 페이지에 놓여 있는 프랑스어 번역문은 이탤릭체로 인쇄하였다.

(중략)

시라는 장르는 원래 산문과는 달리 문자의 공간성을 활용하는 장르이다. 시행과 연이라는 단위를 기준으로 공간적 배열을 통해 독자의 호흡을 안내한다. 예술가책에서 시화집의 활약이 두드러진 것도 그 때문이다. 『까마귀』 역시 시행 배열에 있어 문자의 공간성을 십분 활용하였다. 영어 본문의 경우 각 연을 이루고 있는 여섯 행 중 마지막 행은 다른 행 길이의 1/2 정도밖에 되지 않아 일관되게 들여쓰기하여 앞 행의 중간 지점부터 텍스트가 시작되게 하였다. 프랑스어 번역본은 여섯 행의 길이를 거의 비슷하게 맞췄지만 첫 행에 약간 들여쓰기를 함으로써 역시 각 연이 일정한 모양을 유지하게 하였다.

사실 이것은 시 번역을 두고 말라르메가 깊게 고민한 결과이다. 영어 원문의 경우 당시 대개의 서구 시가 그랬듯 행의 마지막 음절에 동일한 모음과 자음을 놓는 각운을 사용함으로써 시의 청각적 리듬을 살리고 있는데 프랑스어 번역본은 그 청각적 운(rime)을 재현할 수 없었다. 특히 각 연의 마지막 행에 반복되는 ‘nevermore(다시는)’라는 단어의 어두운 울림을 프랑스어의 ‘jamais plus(다시는)’가 만들어 낼 수 없음을 말라르메는 무척 아쉬워했는데, 결국 청각적 리듬 대신 시각적, 공간적 리듬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였고 그것이 이와 같은 시행 배열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도윤정, 「말라르메는 어떻게 문자의 시각성과 공간성을 실험했는가」, 계간 『더 티(the T)』 2017년 봄호, 41~43쪽


『까마귀』는 19세기 초엽 미국 문학계를 이끈 시인 겸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장시다. 인용문에 언급된 ‘네버모어(nevermore)’는 시의 화자가 까마귀를 부르는 명칭이다. 무슨 질문을 던지든 까마귀가 ‘네버모어’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원문 시를 구송하다 보면 시어 ‘네버모어’가 마치 훅 송의 가사처럼 전체 시구의 운율을 조성해 냄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두 번 다시는’이라는 어의(語義)가 자아내는 기기묘묘하고 서늘한 정서에 젖어 들게 된다. 영문 시어의 불문 번역어 ‘쟈메 플루스(jamais plus)’가 원문의 “어두운 울림을 (⋯)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는 말라르메의 언어 감수성도 인상적인데, 문제의 사안을 들여쓰기 운용이라는 타이포그래피로써 극복했다는 사실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작가로서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수준을 초월해 텍스트를 공감각적으로 다루며 “청각적 리듬 대신 시각적, 공간적 리듬”을 지어 낼 줄 알았던 말라르메의 디자이너적 태도. 문필업 종사자들이 두고두고 숙고해 볼 만하다.


도윤정의 말라르메 예술가책 해제는 편집 디자인의 단계, 즉 글쓰기 완료 후 수립되는 타이포그래피 공정을 세밀히 풀이한 글이었다. 다 읽고 나니 뒤이어 또 다른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다면 작가가 글을 써 나가는 동안에도 타이포그래피를 응용할 수 있을까? 타이포그래피적 글쓰기는 가능한가?’ 혼자 궁리를 해 보다가 문득 이상(李箱)을 떠올렸다. 이상은 문학계와 디자인계 양쪽에서 자주 거론되는 드문 존재다. 한국 근대 문학의 주요한 인물이니 당연히 문단 내 연구와 기념 활동이 활발한 것은 당연하다. 디자인 분야에서는 그래픽 디자이너 안상수의 1995년 박사 논문 「타이포그라피적 관점에서 본 이상 시에 대한 연구」 이후 ‘디자이너들이 사랑하는 시인’의 위상을 갖게 된 것 같다. 이상 특유의 작풍, 그러니까 타이포그래피적 글쓰기라 이를 만한 일련의 작품들이 현대 시각 디자이너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는 것이리라. 국내 문단에서 이상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문학평론가 권영민도 이상 시의 타이포그래피적 특징을 밝힌 바 있다.


시 「출판법」에는 ‘나’라는 시적 화자가 전면에 등장한다. ‘나’는 실제적인 인물이 아니다. 인쇄에 필수적인 ‘활자’를 의인화한 가상의 인물이다. ‘나’는 시적 진술의 주체로서 활자의 배열을 통해 텍스트를 구성하게 되는 타이포그래피의 과정을 조밀하게 그려낸다.


권영민, 「타이포그래피의 공간과 시적 상상력」, 『이상 텍스트 연구: 이상을 다시 묻다』, 뿔(웅진), 2009, 248~249쪽


이상의 시 가운데 「출판법」과 마찬가지로 타이포그래피적 상상력에 기반하고 있는 작품으로 「파첩(破帖)」을 손꼽을 수 있다.

(중략)

이 작품의 시적 화자인 ‘나’는 「출판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쇄 활자를 의인화한 것이다. 거대한 ‘도시’의 형상은 조판을 통해 구축된 텍스트의 물질세계를 암시한다. 하나하나의 활자들이 모여 ‘글’이라는 새로운 텍스트의 세계를 구축하는 조판 과정이 ‘시가전’에 비유되고 있으며, 이 원판을 바탕으로 지형을 제작한 후에 원판 자체를 헐어버리는 해판 과정이 ‘도시의 붕락(崩落)’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 작품의 전체 내용에서 교묘하게 패러디하고 있는 타이포그래피의 방법과 절차는 조판 과정, 원판의 복판을 만들어두기 위한 지형 제작, 원판 자체를 헐어버리는 해판 과정을 통해 거대한 인간의 도시가 구축되고 다시 붕괴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같은 시법을 통해 시인은, 인간에 의해 발명된 언어와 문자가 문명을 만들고 그것이 숱하게 신의 뜻을 거절하면서 스스로 멸망의 길에 빠져드는 과정을 고도의 비유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책, 259~260쪽


이상의 시 「출판법」과 「파첩」 전문을 병독해야 위 인용문의 해설이 명징히 다가올 것이나, 지금은 골자만 개략적으로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두 시는 의인화된 활자 ‘나’를 앞세운 “타이포그래피적 상상력에 기반”한 작품들이다. 「출판법」의 경우 ‘모였다가 흩어지는’ 시어 배치 및 행과 연 배열로써 일련의 활판 인쇄 도정(조판, 지형 제작, 해판 등)을 시각화하고, 이러한 시적 전개를 통해 “인간의 도시가 구축되고 다시 붕괴되는 모습”을 그렸다. 타이포그래피라는 대지(垈地) 위에 문학이라는 건축물을 세운 셈이다. 광활한 백지를 줄지어 채워 나가는 글쓰기가 아니므로, 싯줄과 싯줄을 줄이고 늘이거나 비우고 불러들임으로써 대지 면적(작가 스스로 상정한 타이포그래피적 규칙과 제약)에 대한 연면적(텍스트의 분량 및 글줄의 형태)을 알맞게 조정하듯, 용적률을 계산해 가며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시쳇말로 ‘그분’을 영접한 은덕으로 술술 글월을 창조해 내는 경지를 희구하는 문필업 지망생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반드시 이상의 ‘타이포그래피 시’를 독경하듯 읽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보편의 글쓰기와는 좀 다른 타이포그래피적 ‘글-놓기’ 방식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영감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 책 소개(도서 콘셉트, 분량, 차례, 작업 일정 등): 바로 가기

― 다음 연재: 2024년 1월 30일 화요일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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