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덴티티 디자인 = 타자의 정체성을 설계하기
앞 장의 말미에 꺼냈던 아이덴티티 디자인 이야기를 좀더 이어가 보려고 한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이해가 미천했던 에디터 근무 초기, 제일 생소하게 다가온 것이 아이덴티티 디자인이었다. 이름난 그래픽 디자이너 및 서체 디자이너, 그리고 독립 스튜디오의 홈페이지 곳곳을 탐문하면서 그들의 직무와 업황을 자습하던 시기였다. 향후 직업적으로 관계 맺게 될 일군인지라, 디자인 비전공자로서는 디자이너들의 직업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보면서 최소한 유사 동종업자 정도의 정서적 구색은 갖추고 싶었다. 그렇게 예습을 하는 동안 아이덴티티 디자인이라는 과업을 처음 알았다. 직역하면 정체성 설계인데, 디자이너들 사이트의 ‘WORK’ 또는 ‘PROJECT’ 페이지에 게시된 관련 작업 소개문을 아무리 읽어 보아도 불가지의 언술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크고 작은 기업과 브랜드, 혹은 개인 자영업자의 의뢰를 디자이너가 수행함으로써 성사되는데, 이러한 발주·수주 양태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왜 남한테 만들어달라고 하지?’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한 몰이해뿐 아니라 브랜딩 개념조차 몰랐던 신입 에디터의 황당무계한 삐딱선이라 해 두자. 어쨌든 그 삐딱선이 아이덴티티 디자인 이해의 출발선이기도 했다. 고정 관념을 고쳐먹어야 했으므로 사내외 디자이너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아이덴티티 디자인론을 청해 들었다. 그중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답변 다섯 가지를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채록해 본다.
#1 “보통은 감독이 배우를 캐스팅하잖아요? 시나리오 다 쓰고 나서 극중 캐릭터를 잘 소화할 만한 연기자를 물색한다는 말이죠. 아이덴티티 디자인은 말하자면 거꾸로랄까요. 배우가 감독을 찾아가요. ‘내가 이번에 이러이러한 배역을 맡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영화 한 편 만들어 주시겠어요?’ 감독은 배우가 원하는 역할의 디테일을 꼬치꼬치 물어 가면서 각본을 완성하고 크랭크인을 하는 거죠.”
#2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냥, 누군가의 정체성도 디자인의 대상인 거다, 이렇게 받아들이면 돼요. 사람 몸에 입히는 옷도 디자인하는데 사람 자체를 디자인 못 할까.”
#3 “하이데거였나, 어떤 철학자가 그랬대요. 모든 존재는 미완의 형태로 종말에 이른다고. 그러니 다들 완성형에의 욕망이 있지 않겠어요? 아이덴티티 리뉴얼, 즉 자신의 정체성 갱신을 디자이너라는 타인에게 선뜻 맡기게 되는 동인이죠. 지금보다 좀더 나은 형태로 거듭나고 싶은 욕망이랄까, 그런 건 기업이든 가게든 개인이든 누구에게나 있을 거잖아요. 디자인은 어떻게 보면 욕망의 기제로 작동하는 것도 같아요.”
#4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 자주 나오잖아요. ‘네 정체가 무엇이냐.’ 디자이너는 그 물음에 대해 갖가지 시각 언어로 답하는 대변인이죠.”
#5 “제임스 본드가 브리오니 대신 에르메네질도 제냐를 입었다면? 롤렉스 말고 브라이틀링을 찼다면? 마티니가 아니라 스카치를 마셨다면? 애스턴 마틴이 아니라 맥라렌을 몰았다면? 어떨 것 같냐고 대답해 보라는 질문이 아녜요, 에디터 님. 그냥 딱 상상을 했을 때 느낌이 어떤지가 중요해요. 브리오니 슈트 차림에 브라이틀링을 차고 스카치를 마시며 맥라렌을 모는 영국인 첩보원의 이미지. 그런 인물이 존재할 수도 있기는 하겠죠. 하지만 절대로 제임스 본드스럽지는 않잖아요? 그런 겁니다, 아이덴티티 디자인이란.”
일견 과도하게 수사적인 데다 허풍스럽게 들릴 소지도 다분한 발언들이다. 물론 이와는 정반대의 답변을 들려 준 디자이너들도 상당수였다. 적시적인 마케팅 전략과 타깃을 근거로 소비자에게 직관적으로 소구될 수 있는 시각 아이덴티티를 구현하는 것이 관건이다, 같은 정석의 설명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과서적 언명보다는 위에 인용한 다섯 사람의 진술이 보다 유익했다. 디자인 비전공 신입 에디터 겸 업계 초심자의 미진한 안목에 좀더 부합하는 감성적 터치였다고 할까. 좌우지간 아이덴티티 디자인이라는 작업 유형을 다듬다듬 문견하여 알아듣는 데 매우 실효적이었다.
글쓰기 또한 텍스트로 행하는 아이덴티티 디자인, 즉 타자의 정체성을 설계하는 작업이다. 이때 타자란 글쓴이가 자기 텍스트 공간에 의도적으로 부리어 펼쳐 놓는 여러 요소들을 통칭한 말이다. 논설문이라면 주장하는 바를, 수필이라면 글제로 표방한 주제와 글감을, 소설이라면 등장인물들을, 시라면 시적 화자를 고유히 설정하여 행과 행을 세공한다. 이 책 『디자인-글쓰기』 같은 경우 여는 글에서 밝힌 바대로 디자인과 글쓰기 행위를 수미상응 관계로 보아 ‘디자인-글쓰기’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했다. 물론 작가가 설계한 정체성이라는 구조체의 품질 검수는 전적으로 독자(그리고 편집자) 몫이다. 호평 일색인 글편과 저작물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제술(製述) 디자인이 잘된’ 텍스트 콘텐츠라 이를 만하지 않을까.
시각 디자이너들은 아이덴티티 디자인 과업을 위해 어떤 사고를 하고 무엇을 고찰하는가. 이에 대한 탐구를 글쓰기 공부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이를까, 글을 잘 쓰고자 문장력과 어휘력을 숙련한다는 일을. 여기에 시각 디자이너들 특유의 대상 인지 관점까지 참고 및 차용한다면 글 짓는 행위의 설계적 측면을 더욱 세심히 고려하게 되리라.
― 「아이덴티티 시스템과 내러티브 계약 ②」로 이어집니다.
― 연재 일정을 기존의 ‘매주 토요일/일요일’에서 ‘매일’로 변경하였습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