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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재훈 NOWer Jan 30. 2024

반복 말고 변복

변복(iteration): 변화를 생성하는 반복


반복은 강조, 균형, 대비, 대칭, 리듬, 비례, 통일 등과 더불어 디자인의 기본 원리 중 하나다. 어도비 공식 홈페이지는 반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반복은 단순히 반복되는 디자인 요소를 나타냅니다. 일부 반복은 단순히 글꼴 또는 색상 등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크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일부 반복은 바둑판처럼 의도적인 패턴이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집니다. 다른 사용법은 강조를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디자인 요소를 반복하여 친숙함과 이해도를 높이고 요소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습니다. 로고나 색상의 경우 반복도 디자인 전반에 걸쳐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작품 전체를 위한 것이든,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든 서로 다른 조각을 연결하여 하나로 묶는 모티브가 확립됩니다.


어도비 익스프레스 튜토리얼 페이지 ‘그래픽 디자인의 기본 원리 이해


입사 초 디자인 팀 사무실 책장에 꽂힌 몇몇 입문자용 이론서들을 들춰 보면서 자습을 하고는 했다. ‘반복’ 요소도 그때 배운 것 중 하나다. 그렇구나, 하고 깊이 궁리하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여백, 그리드, 타이포그래피와 같이 웅숭깊은 개념어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복은 반복이지. 그냥 이렇게만 이해하고 더는 집착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출판 디자이너 정병규의 세미나를 청강할 기회가 생겼다. 주제가 ‘한글 문자학’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용이 워낙 학제적이었던 터라 분별없이 그저 노트 필기만 하다 보니 어느새 강의가 끝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날 배운 한 가지만큼은 이때껏 잊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반복에 관한 사고방식이다. 반복 행위를 바라보는 관점의 확장이라고 표현해야 더 알맞을 듯하다. 반복은 반복이지, 이러고서 손을 놓아 버렸던 지점 너머에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반성했다.


세미나에서 정병규는 반복과 더불어 ‘변복(變復)’이라는 낯선 단어를 제시했다. ‘변화를 생성하는 반복’을 의미한다. 변화와 반복을 상응의 짝으로 잇고자 강사 스스로 만든 조어다. 말 그대로 변화는 변하는 것, 반복은 되풀이하는 것. 이 둘이 어떻게 서로 어울린다는 말인지. 언뜻 들어서는 난센스 같았다. 어리둥절한 청강자들을 위해 정병규는 사유의 단서가 될 만한 영단어 하나를 추가로 선보였다. ‘이터레이션(iteration)’이라는 낱말이었다. 컴퓨팅 용어인데, 정보 처리 절차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 전산 단계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물론 세미나 당일에는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반복, 변복, 이터레이션 등 그날의 제시어들을 한 맥락으로 꿰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강의 종료 시점을 기준으로 거듭 궁리를 하면서 혼자만의 해제를 시도해야만 했다. 우선은 이터레이션 어의를 찾아 보는 일부터 시작했다.


Iteration is the repetition of a process in order to generate a (possibly unbounded) sequence of outcomes. Each repetition of the process is a single iteration, and the outcome of each iteration is then the starting point of the next iteration.


Wikiepedia ‘iteration


위키피디아 영문판에서 ‘iteration’을 검색했을 때 볼 수 있는 설명이다. 국역하자면 어떠한 목표 또는 대상에 가 닿거나 특정한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절차가 곧 ‘이터레이션’이다. 문맥상 이터레이션은 단일하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수행되는데, 여기서 핵심은 한 차례의 이터레이션을 통해 도출된 결과값이 또 다른 이터레이션의 시작점이 된다(the outcome of each iteration is then the starting point of the next iteration.)는 것이다. 컴퓨터 밖 현실 세계의 타이어 제조 공정이 이터레이션-변복의 예시다. 타이어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정련, 압출, 압연, 비드(bead), 성형, 가류, 검사 및 출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각각의 공정은 기술적으로 고도화된 반복 업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정련 없이는 압출로, 압출을 생략해서는 압연으로, 비드를 빠뜨리고는 성형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분임되어 각개 구동되는 공정 하나하나가 제 차례 다음의 공정을 가능케 하는 시작점인 셈이다. 반복을 통한 생성, 그러한 반복-생성의 무한 반복, 그로써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성의 축적. 변복이란 한마디로 종결되지 않는 생성적 설계 행위다.


변복 개념을 적용할 만한 디자인 작업은 무엇일지 곰곰 궁구하다 보니 기업의 아이덴티티 프로젝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업으로부터 과업을 의뢰 받은 디자이너들은 프로젝트 소개 시 ‘통일된 아이덴티티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표현을 통상적으로 쓰고는 한다. CI(Corporate Identity) 혹은 BI(Brand Identity), 로고타이프, 비즈니스 컬러, 전용 글꼴, 캐릭터 등 다발의 아이덴티티 요소들은 향후 기업에 의해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미디어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소비자들과의 접촉이 거듭됨에 따라 디자이너가 의도한 ‘기업 이미지’라는 인상이 형성되고, 특정 기업에 대한 일관된 형용사가 소비자들의 인식 체계 안에 자리잡을 것이다. 디자이너의 설계물이 용처별 각지각처에서 반복적으로 현시하되, 그 각물은 보이지 않게 맞물리면서 서로가 서로의 시작점으로 기능한다. 그렇게 기업과 브랜드의 정체성이 생성된다.


변복의 렌즈로 들여다본 디자인 행위는 동사적이었다. 작업물 납품을 끝낸 순간 해당 과업과 연관된 일체의 시공간이 즉각 과거로 넘겨져 고정되고 마는 명사적 실무가 아니라, 납품과 동시에 현실 세계로 발진하여 반복-생성을 거푸하는 동사적 실물. 반복 말고 변복을 구현하라는 정병규의 일성을 세미나 청강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약간은 알 것도 같았다. 비록 디자이너는 아니나 글 쓰는 직능인으로서나 일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나 변복은 꽤 엄중하게 천착할 만한 과제로 여겨졌다. 글 한 편에 의도적으로 써넣은 일련의 반복 구문과 거듭 등장하는 심상은 과연 서로가 서로의 시작점으로서 기능하는가. 내가 날마다 되풀이하는 행위는 무언가를 생성하는 힘을 지니는가. 어제와 같고 작년과 같고 내년과도 같을 지금의 쳇바퀴에는 변복의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생성해 내지 못한 채 그저 반복을 반복할 뿐은 아닌가⋯⋯.


― 책 소개(도서 콘셉트, 분량, 차례, 작업 일정 등): 바로 가기

― 다음 연재: 2024년 1월 31일 수요일

※ 연재 일정을 기존의 ‘토요일/일요일’에서 ‘매일’로 변경하였습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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