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재훈 NOWer Jan 31. 2024

아이덴티티 시스템과 내러티브 계약 ②

‘서사적 합의’라는 시스템 혹은 계약


예술청은 공동의 의사결정과 수평적 구조를 갖는 거버넌스 기반의 플랫폼입니다. 예술인이 주도하는 연결, 연대, 확장의 가치를 담은 예술청은 20명의 공동운영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자율과 평등 그리고 상생을 통한 예술인 창작 활동 및 권익 보호 지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담고 있는 예술청은 다양한 참여 주체의 능동적인 교류를 통해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창의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예술청(SAP) 아이덴티티의 핵심어는 여백의 공간(Empty Space)입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여백의 공간은 예술가와 기획자 그리고 활동가 모두가 만들어나갈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이자 창의의 공간입니다. 일상의실천은 예술청(SAP)의 주인공인 A(Artists)가 가리키는 무한한 가능성의 의미를 다양한 이야기가 담길 수 있는 아이덴티티 시스템으로 연결 짓습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선(Line) 모티프는 여백의 공간 위에서 예술청의 다양성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스튜디오 ‘일상의실천’ 홈페이지, 예술청(SAP) 아이덴티티 디자인 소개문, 2021




인터뷰어. “말씀하신대로 이번 브랜드 북은 텍스트 북, 이미지 북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인상깊었습니다.”

인터뷰이. “텍스트와 이미지에 각각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의도에서 분리한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 디자인을 계속 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프로-스펙스가 지닌 헤리티지라 함은 단순히 긴 역사성에 있기 보다는, 어떤 ‘순간들의 총합’에 깃들어져 있는게 아닐까 했지요. 그러한 순간과 찰나를 모아서 본다면 각자 나름의 인상과 기억을 갖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큰 판형의 이미지로요. 이는 어쩌면 우리가 브랜드를 인지하고 기억하는 방식과 흡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브랜드를 이론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기에 앞서 단편적인 인상과 느낌이 먼저 자리잡게 되면서 그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에 비로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처럼요.”


스튜디오 ‘마이케이씨(MYKC)’ 김기문 인터뷰, 「헤리티지 브랜드가 오늘을 브랜딩하는 법: 프로-스펙스 브랜드 북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 『헤이팝』, 2023. 6. 8.




세계 문학 시리즈는 100권이 넘는 책이 나오기 때문에 나 혼자 그것을 다 디자인하는 건 무리이고, 여러 디자이너가 돌아가면서 만든다. 열린책들의 경우 현재는 ‘전체를 보았을 때의 색감’을 강조함으로써 출판사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가령 하나의 시리즈를 디자인할 경우에 이미지는 비슷하게 사용하되 표지의 바탕색을 다양하게 해 책장에 꽃아두었을 때 다채로운 색이 나오게끔 하는 식인데, 움베르토 에코의 저서를 모은 ‘에코 마니아 컬렉션’이 그러한 사례이다. — 디자이너 석윤이


(전략) 현재는 특정 디자인 스타일을 고집한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선배 디자이너들이 만들어 놓은 과거의 전통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보고 배우게 마련이지만, 거기에만 얽매일 수는 없다. 지금은 일단 출판사의 색을 드러내기보다는 책 한 권 한 권의 성격과 콘셉트에 맞는 디자인을 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 디자이너 김형균


전집에 담긴 출판사의 아이덴티티」, 월간 『디자인』 2011년 3월호




인터뷰어. “문장은 명확하게 떨어지는데 읽는 내내 ‘어렵다’를 반복하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하는 단편집이다. 소설에서 소녀 화자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하는데, 앞뒤 설명 없이 바뀐 화자가 달라진 환경에서 각각의 에피소드를 이어간다.”

인터뷰이. “영화로 치면 시퀀스가 혼란스럽다는 것처럼 들린다. 실제로 이 책 쓸 때 명확한 스토리가 없는, 영상만이 할 수 있는 장면의 섞임을 표현하고 싶었다.”

인터뷰어. “각 에피소드의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하는 일반의 시각에서 이 에피소드에 적응이 쉽지 않다. 단문, 짧은 에피소드를 겹친 소설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다.”

인터뷰이. “시간을 평면으로 봐서 모든 것을 동시성에 놓고 썼다. 말하자면 원근이 없다. 오늘로부터 어린 시절은 멀고, 어제는 가깝다는 개념을 없앴다. 그렇게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소설가 배수아 인터뷰, 「“스토리텔링은 지루⋯ 이번엔 시간의 원근을 없앴어요”」, 한국일보, 2017. 11. 22.




그러니까 작업-작품의 정체성 설계에 대한 디자이너-설계자들의 해설이다.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이 작업한 ‘예술청(Seoul Artists’ Platform, SAP)’ 아이덴티티 디자인 설명문을 먼저 살펴보자. 이 작업물의 바탕을 이루는 디자인 모티프는 “선(Line)”이다. 영어 두문자 단체명인 SAP의 경우, 정자체인 S와 P 사이에 마치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연상시키는 ‘A 모양으로 형상화된 선’이 자리하고 있다. “아이덴티티 시스템”으로서 이 선은 알파벳 A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도형과 기호로 반복 변용되면서 “A(Artists)가 가리키는 무한한 가능성”을 시각화한다. 이러한 체계 하에 직선이 아닌 곡선을 “여백의 공간”이라는 평면에 배치한 만듦새는 일상의실천이 의도한 디자인 문법일 것이다. 수학적으로 곡률(曲率)은 평면에 놓일 때 무한대이므로.


스포츠 의류 브랜드 프로-스펙스의 브랜드 북이 이미지 북과 텍스트 북으로 이종 설계된 맥락은 또 어떠한가. 디자이너 김기문이 밝힌 바대로 “순간들의 총합”이 바로 그것이다. 브랜드 히스토리의 “순간과 찰나”를 (한 권으로 한눈에 보기가 아니라) 두 권으로 나누어/모아 보기, 역사서로 치면 통사보다는 미시사에 가까운 구성, 그러한 나누기/모으기 방식을 통해 해당 브랜드에 대한 수용자(고객)의 “인상과 기억”을 조각 모음 하듯 상기시키기. 이 설계안은 1981년 론칭 후 오랜 시간 고객들과 함께해 온 국산 장수 브랜드 고유의 친밀감을 부각한다. 40여 년 “순간들의 총합”이라는 아이덴티티 시스템의 구동 원리다.


그런가 하면 디자인 전략에 따라 출판사별 세계 문학 전집의 인상이 달라지기도 한다. “출판사의 아이덴티티를 드러낸다”는 입장과, 정확히 이와 반대로 “출판사의 색을 드러내기보다는 책 한 권 한 권의 성격과 콘셉트에 맞는 디자인”을 추구한다는 지론. 똑같은 『노인과 바다』라 해도 콘텐츠 용기(容器)로서 책의 물성 자체가 발산하는 시각 정체성과, 그로 인한 독자들의 감각 반응은 판이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는 소설가의 발언을 참고해 볼 차례다. 위의 마지막 인용문은 배수아가 2017년 단편집 『뱀과 물』 발표 후 가진 인터뷰다. “읽는 내내 ‘어렵다’를 반복하게 되는, 기이한 경험”이라는 인터뷰어의 감상에 작가는 “명확한 스토리가 없는, 영상만이 할 수 있는 장면의 섞임을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답한다. 기승전결 뚜렷한 보편의 서사 구조를 벗어난 작품이므로 읽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다, 라는 대답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이에 대한 배수아의 부연은 ‘시간의 원근감 탈피’ 즉 ‘과거·현재·미래 일체를 동시성의 선상에 안배하기’다. 이러한 평면적 시간 운용 하에 단편집 수록 소설 일곱 편은 시종일관 낯선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과거가 현재 시제로, 현재가 미래 시제로 다가오는 기이한 읽기 경험—저자가 의도한 “영상만이 할 수 있는 장면의 섞임”—을 구현하는 것이다. 시제가 뒤엉킨 듯한 전개임에도 어수선하지 않고 통일성을 확보하는 까닭은, 수록작 전편을 관통하는 ‘시간의 원근감 탈피’ 체제가 공고하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이 각개의 단편소설들을 유기적으로 통합시킨다. 마치 일상의실천이 위시한 ‘선’ 모티프가 갖가지 변주 속에서도 ‘예술청’ 아이덴티티의 일관성을 지키는 붙듦줄 역할을 하듯.


디자인의 아이덴티티 시스템에 해당하는 글쓰기의 기제로 ‘내러티브 계약’이라는 것을 꼽고 싶다. 사전적 정의는 ‘이야기의 존립 근거가 되는, 서술자와 읽거나 듣는 사람 간의 합의’다. 계약 조건과 내용이 만족스러울수록 작품과 독자 간 소통도 원만해질 터. 디자이너가 아이덴티티 디자인을 기획할 때, 작가는 ‘계약서’를 쓴다. 글쓰기는 그다음이다.


― 책 소개(도서 콘셉트, 분량, 차례, 작업 일정 등): 바로 가기

― 다음 연재: 2024년 2월 1일 목요일

※ 연재 일정을 기존의 ‘토요일/일요일’에서 ‘매일’로 변경하였습니다.






글쓴이. 임재훈

윤디자인그룹이 운영하는 온라인 디자인 매체 『타이포그래피 서울』의 에디터로 근무했다. 타입·타이포그래피 전문 계간지 『더 티(the T)』 9·10·11호의 편집진 일원으로 일했다. 경기도시공사, 한국언론진흥재단, 효성그룹 등 국내 기업 및 기관의 홍보 콘텐츠 제작에 참여했다. 저서로 『실무자를 위한 기업 홍보 콘텐츠 작법』과 『잘나가는 스토리의 디테일』, 공저로 『나답게 사는 건 가능합니까』와 『소셜 피플』(총 8부작)이 있다. 2023년 단편소설 「공동(空洞)」으로 스토리코스모스 신인 소설상을 수상했다.

이전 12화 아이덴티티 시스템과 내러티브 계약 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