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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바이지은 Jun 14. 2023

약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애 엄마한테 적성이 뭐가 중요해. 일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지!

나는 서른여섯 살에 수능을 보고, 서른일곱에 한약학과에 입학, 마흔한 살에 면허를 따고 한약사가 되었다. 어느덧 다시 사회인이 된 것이다. 한약사의 진로는 다양하다. 한방병원, 원외탕전실, 제약회사, 연구시설, GMP시설, 약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다. 나는 초등학생 아이가 있는 애엄마이므로 풀타임 일자리는 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고, 파트타임이 가능한 약국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중에 내 약국을 개국하게 될 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다.


우리 집 초딩 꼬마는 오후 1시면 학교가 끝난다. 이후엔 아이를 돌봐야 하니 평일은 도저히 일 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주말 중 일요일에, 집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조용한 곳에 있는 약국에 출근하게 되었다. 일자리는 데일리팜 구인공고를 보고 알게 되었고,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본 후 근무가 확정되었다. 


한약사가 약국에서 일할 때는 일반약 판매를 담당하는데, 중요한 건 약의 위치를 외우는 것이다. 증상을 듣고 약을 골라 바로 찾아 주는 것이 중요하고, 상품명을 콕 짚어서 약을 찾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에 헤매지 않고 능숙하게 찾아야 한다. 동일 성분 다른 제품의 성분과 용량을 숙지하고, 차이점을 인지해야 한다. 복용법, 주의사항도 알아야 한다. 학교에서 약 성분만 배웠지 제품을 배우진 않았으므로, 어떤 약이 어떤 효능을 가졌는지, 감기약부터 영양제까지 약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약들을 전부 꿰차고 있어야 했으므로 일하기 전 약 2주간 교육과정을 거쳤다.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약국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와! 긴 공부를 끝내고 드디어! 내가! 약국에서! 일을 하게 됐구나!!'류의 기쁨이나 설렘 같은 건, 없었다. 나는 안다. 나를 설레게 하는 일은 방송이었다. 열정페이를 받더라도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엄청 좋았으므로, 거친 방송바닥에서 10년을 버틸 수 있었다. 매일매일 생방을 하는 스펙터클한 방송일을 결혼과 출산을 이유로 그만뒀을 때, 나는 생각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렇게 재밌는 일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이런 내가 과연 새로운 일에 만족할 수 있을까 면허를 따고도 고민이 많았다. 


거대한 자아실현이나, 장대한 목표는 없었다. 나를 나 스스로 먹여 살릴 수 있는 안정적인 일거리를 시작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십몇평쯤 되는 약국에 하루종일 앉아있으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막상 약국에서 근무해 보니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얼마나 얄팍했는지 단 하루 만에 깨닫게 되었다. 


소화가 안되고, 배가 아프고, 구토를 하고, 목이 아프고, 숨이 찰만큼 기침이 심하고, 몸살 기운에 으슬으슬 춥고, 열이 나고, 콧물이 줄줄 나거나, 알레르기로 피부가 가렵고, 다쳐서 상처가 나고, 저마다의 사정으로 약국을 찾는 손님들에게 꼭 필요한 약을 골라주는 일이 얼마나 보람차던지. 성심껏 복약지도를 하면 돌아오는 손님들의 고마운 표현도 참 좋았다. 휴일에 약국을 열어줘서 좋다고, 약을 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말을 들으니 돈 받고 일하는 알바 너머의 보람이 마음에 들어차 뿌듯했다.


이, 그리고 이건 몰랐는데 나는 내 생각보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한다. 할머니 할아버지 손님들도 좋고, 엄마아빠 손잡고 들어오는 귀여운 꼬마손님들도 좋다. 동료들 이야기 들어보면 진상 손님 때문에 힘들기도 한다던데, 아직까지 엄청 힘든 손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 그런건지 아직은 좋다.  


이제 약국에서 일한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일이 익숙해져 손님들 응대하는 일도 편해지고나니 이젠 약에 대해, 특히 내 전공인 한방약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심이 생겨 틈틈 공부하는 중이다. 약국에서 그간 병원약으로도 잘 치료가 되지 않는 증상에 한방과립제를 주었을 때 효과를 본 손님들을 경험하곤 한다. 임상이 이래서 중요하다.  


전에 워킹맘으로 애 둘을 키우며 대학을 보낸 사촌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언니 약국일 좋은데 내 적성에 확 맞진 않는 거 같아."라고 했다가 "야, 애엄마한테 적성이 무슨 소용이야. 애 키우면서 일할 수 있으면 그게 최고지!"라는 대답을 듣고 완전 동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적성이 무슨 소용인가. 이 정도면 충분히 재밌고 의미 있고 앞으로 더 재밌게 일하면 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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