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현대문학상 수상, 2024젊은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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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현은 삼 년 전, 여자 친구 서일에게 팔천만 원을 대출해 주고 전세보증금과 일억 육천만 원 빚을 지고 있다.
2. 꿈 속에서도 반려빚에 목줄이 잡힐 정도로 빚에 시달리는 형편이다. 백 퍼센트 신뢰했기에 그랬다.
3. 신용점수 만점이라고 생각하며 서일에게 돈을 대출해 주었지만 서일은 더 필요한 것을 찾아 떠났다. 정현은 연락이 끊긴 서일이를 탓하기보다 자신의 일억 육천 빚진 사람으로 자신의 신용점수에 자책한다.
4. 이혼을 하고 위자료가 있다며 다시 같이 살기를 바라는 서일을 정현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의 선택한 것들이 자신을 배반한 역사가 너무나 길고 깊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일을 너무 믿고 싶어서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따를 수 없었다.
5. 월급이 늦어지고 13만 원을 메꾸기 위해 서일이 선물했던 애플워치를 20만 원에 판다.
6. 정현은 자신의 처지를 맘 편히 털어 놓을 사람이 서일이 뿐이고 믿는다는 서일의 말이 달콤하게 들렸다. 돌고돌아 귀의할 종교를 만난 듯이 다시 서일을 믿을 뻔했다. 선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7. 서일이 보내온 돈으로 대출금도 갚았다. 간간이 여행도 다니고 로또도 샀지만 당첨은 안 된다. 이젠 누구보다 열심히 따지고 셈하는 사람이 되었다.
8. 반려빚이 꿈에 나타나 헤어지자고 했다. 현관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걸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마침내 0이 된 홀가분한 기분. 정현은 그 이상을 바라지도 않고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었다.
반려빚. 평생 함께 사는 반려자, 반려동물, 반려식물처럼 항상 곁에 붙어서 사는 빚을 그렇게 이름 지었다. 나에게도 그런 빚이 있었던가 지난 세월을 되돌아봤다. 은행에서 대출한 적은 학자금 대출, 예금 이율보다 높은 이자를 감당하며 어리석게도 대출을 받아 수업료를 냈던 시절도 있었다. ‘저리 학자금 대출’이라는 광고 문구에 속아서. 수치를 상호 비교도 안 해보고 저지른 철없고 금융문맹시절 이야기다.
두 번째는 첫 애마, 액센트를 뽑으면서 반은 현금 지급하고 절반은 할부로 계약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그 할부금이 남아 있어서 다달이 생활비에 할부금까지 납부하느라 애먹은 적이 있다. 결국에는 고생고생하면서 할부금 납부를 다 하고 몇 달 후 동생한테로 갔다. 최초 애마에 얽힌 추억은 그리 환상적이지만은 않다. 이별하는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있었지만, 그 역사는 실로 피눈물이 나고 처참한 나날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빚을 지고 반려자처럼 평생을 사는 청년세대의 고충을 말하는 것 같다. 일종의 사회 고발성 소설이라고 하면 될까? 문학은 그 시대를 반영하기 마련이므로 고발이 아니더라고 반영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평생 열심히 일하고 모아도 아파트 한 채를 자력으로 구입하기 어려운 세대가 요즘 청년들이다. 부모 도움없이 스스로 집 마련하기 어려운 청년의 고충을 엿볼 수 있었다.
이런 시대에는 친구나 연인도 철저히 계산된 관계가 형성도기 쉽다. 주인공 정현은 여자친구 서일이 마냥 좋았다. 신뢰점수 만점으로 만났고 믿었고 평생 반려자로 생각하며 대출금을 최대치로 빌려 주었지만 배신감만 안겨졌다. 그럼, 서일이는 가해자일까. 그녀도 역시 전세 사기금 피해자다. 고교 졸업 후 저축한 돈 전부가 전세금인데 결론은 반의반도 받을 수 없었다. 네일샵도 불황으로 빚은 더욱 늘어만 가고 서일은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서일이 갚은 돈도 그 출처를 모른다. 경제적 어려움을 반려자처럼 평생 끌어안고 사는 고충을 읽어주는 소설이다.
결말에서 정현이 말한 0의 삶. 마이너스도 플러스도 없는, 대출도 저축도 없는 삶. 0 이상을 꿈꾸는 것도 믿지 못할 세상에 두렵기만 하다. 그래서 홀가분한 0의 상태로 오래도록 지내고 싶어한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바라는 행복 최대치, 꿈의 한계가 0이 아닐까 싶어 씁쓸하다.
"로또 하려고요?"
"로또가 뭔지 알아요?"
"네. 저희 삼촌이 맨날 저보고 번호 골라달라 해요. 제가 난생처음 골랐던 번호가 4등 된 적이 있거든요. 그 뒤로 저한테 번호 고르는 재주가 있다고 하면서 맨날 골라달라 해요. 당첨되면 반 준다면서요."
"그래, 번호 하나만 골라줘."
"나머지 다섯 개는 다 골라놨어요?"
"응. 하나만 더 있으면 돼."
"반 줄 거예요?"
"뭐?"
"당첨되면 반 줄 거냐고요."
"그래, 줄게."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그리고 번호 하나만 골랐는데 왜 반이나 줘요?"
서일의 번호를 가진 초등학생은 정현보다 더 야무진 데가 있었다.
"그렇지…… 네 말이 다 맞다."
정현이 미안하다고 말하고 끊으려는데 다시 야무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로또 번호 고르는 일 같은 건 혼자서 하세요. 난생처음 본 초등학생한테 물어보지 말고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전화는 저쪽에서 먼저 끊어졌다.(11쪽)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이미 다 배웠다고 하던가. 로또 번호 하나도 혼자서 고르지 못해 배신감을 느꼈던 옛 친구에게 전화하는 주인공을 나무라는 초등생의 훈계다. 작가의 목소리가 그렇다. 빚을 반려자처럼 평생 함께 끌어안고 사는 세대이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를 바라는 작가의 외침이다.
하나 더 보태어 로또의 행운, 본인의 노력이나 의지, 능력과 거리가 먼 요행에 기대어 플러스를 취하려는 삶도 꾸짖는다. 그래서 결말에서는 0의 삶, 그 이상의 욕심도 없는 0의 삶을 작가는 해법으로 제시하는 듯하다.
"믿는다고?"
"응, 믿어."
정현에겐 그 말이 꽤 달콤하게 들렸다. 오랜만에 다시 맞잡은 서일의 손도 너무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토록 변변찮은 자신을 믿는다는 서일의 말을, 정현도 믿고 싶었다. 돌고 돌아 마침내 귀의해야 할 종교를 만난 것처럼 정현은 다시 서일을 믿었다. 그 사실이 감격스러워 눈 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선주가 서일의 머리채를 잡지만 않았다면 정현은 서일이 다시 자신의 집으로, 정확히 말자면 전셋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9쪽)
정현의 여자 친구 강서일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녀도 피해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열심히 모은 재산 전부인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도 나름 해법을 찾은 것이 친구와 동거, 결혼, 이혼, 네일샵이다. 정현의 친구 선주가 나타나 머리채를 잡음으로써 정현과 관계는 해결되는 국면으로 흐르지만 읽는 독자는 안타깝기 그지없다.
작가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하는 길이 이 방법밖에 없었을까 싶어 작가의 건강한 해법도 의심하게 된다. 여기저기 돈을 빌려 정현의 대출금을 돌려주고 전화번호까지 바꾸고 잠적해 버린 강서일. 그녀의 이후 삶은 어땠을지 걱정스럽다.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소설이다. 평생 빚을 지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 서민들의 삶이 그렇고, 돈 거래로 얼룩진 관계가 도미노처럼 이어지고 파탄나는 개인의 삶이 그렇다. 가진 자는 법대로 하라며 서일의 전 재산을 돌려주지 않는다. 이 소설은 안타깝고 가슴아픈 우리 사회를 비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