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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May 06. 2024

맡겨진 소녀


1, 클레어 키건의 <말없는 소녀> (중편)  

         

(1) 분량과 단락장 


1.

나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조용히 혼자 지내는 아이다. 여름 방학 한 달 동안 아이가 없는 외가 친척집에 맡겨진다. 가족과 가정은 뒷전이고 투박하며 경마 투기를 하는 아빠, 많은 아이를 키우고 가사로 힘든 엄마다. 나의 부모는 모두 친절하지 않다. 아빠는 예의가 바르지도 다정하지도 않다. 그런 가정에서 글자도 겨우 읽고 ‘네’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도착하자 눈높이를 맞추어 친절하게 소녀를 맞이한다. 

2.

뜨거운 물에 다정하게 목욕시키는 아주머니의 손길. 옷이 없어서 아주머니 집에 있는 남자애 옷을 입고 지내는 한 달. 우물에 가서는 비밀을 만들지 말라고,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다고 하는 아주머니 아니, 이모. 이모는 혼잣말로 ‘네가 내 딸이라면 절대 모르는 살 집에 맡기지 않을텐데’라고 소녀가 잠든 머리맡에서 혼잣말을 한다. 

3.

간밤에 이불에 실수한 것을 야단치지 않고 매트리스를 탓하며 세탁하는 배려심 깊은 이모. 소녀는 이모의 간단한 일을 돕고 이모부는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시킨다. 내일은 순록처럼 더 빨리 달리라고 말하면서 아름다운 숙녀로 자라기를 격려한다. 

4.

킨셀라 이모부는 아이도 없는데 학교를 돕는 자선 복권을 사겠다고 함. 카드 게임을 즐기는 아저씨 친구들이 화목하다. 카드로 도박하는 소녀의 아빠와 대비되는 장면이다. 

5.

미사를 보려면 더 괜찮은 옷이 필요하다는 이모부의 뜻에 따라 시내로 간다. 이모부는 1파운드 용돈을 주고 이모는 옷을 사줌. 장레식장에 갔다가 이웃집 아주머니와 돌아옴. 그 아주머니의 지나친 호기심과 입방정으로 여태껏 입었던 옷이 죽은 남자아이의 옷이라는 것과 그 아이가 수렁에 빠져 죽은 사실을 알게 됨. 이런 내용을 이모 부부에게 말함. 상심한 이모를 혼자 쉬게 하고 이모부와 같이 해변에 다녀옴. 두 개였던 바다의 불빛이 돌아올 때는 세 개로 보임. 두 명 가족이 세 가족으로 된 듯한 간접 묘사. 아픔을 비밀로 하지 않고 공감하고 공유함으로써 가족이 된 듯함. 이모부가 딸처럼 꼭 끌어안는다. 

6.

소녀는 이모 부부와 더욱 친해졌을 무렵, 엄마가 남동생을 낳았다는 편지가 온다. 이모는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라며 소녀를 달랜다. 돌아갈 때가 되어서 스웨터 선물을 준비하는 이모. 이모는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뜻으로 너무 늦어서 못 입게 될지도 모르겠다며 유머도 한다. 

7.

짐을 챙기는 나, 어려운 단어가 나오는 책을 읽어줬던 이모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소녀, 우물에서 물 길어오기를 하다가 우물에 빠짐.  

8.

우물에 빠진 나를 극진하게 보살피는 이모. 집으로 오는 길에 ‘아빠가 카드게임을 하다가 암소를 잃었어요’라고 말하는 소녀. 이모부와 대조적인 아빠. 가난한 우리 집에 또 아기는 태어나고. 나와 나의 옷차림을 보고 달라짐을 알아채는 언니들.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아빠. 킨셀라 이모부는 감자와 잼을 선물함. 떠나는 킨셀라 이모부를 향해 달려감. 친아빠가 온다고 ‘아빠’라며 경고하고 친절했던 킨셀라 아저씨를 다정하게 안으며 ‘아빠’라고 조용히 부름.         

  



(2) 읽은 느낌과 그 이유   


클레어 키건의 소설이다. 작가는 1968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마도 그가 경험한 어린 시절에 허구를 얹어 소설로 엮은 듯하다. 다자녀 가정의 딸아이. 엄마가 또 아이를 출산할 즈음 먼 친척 집에서 지내는 여름 한 철 동안의 이야기다. 분량은 백 쪽이 채 되지 않고 짧다. 

     

이토록 짧은 분량으로 무슨 이야기를 전할까. 의아스럽게 읽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으로 시작한다. 소설 작법 중 하나다. 시간 배경으로 출발. 그런 다음 공간과 인물이 사건을 서서히 전개한다. 처음엔 실마리를 제공하고 전개로 그리고 절정으로. 그 순서를 잘 따르는 내용이기에 읽기 편하다.      


일요일 이른 아침, 클로너걸에서의 첫 미사를 마친 다음 아빠는 나를 집으로 데려가는 대신 엄마의 고향인 해안 쪽을 향해 웩스퍼드 깊숙이 차를 달린다. 덥고 환한 날이다.(9쪽)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묘사다. 풍경, 인물, 행동, 사건 등 모든 대상을 수채화 한 폭에 담듯이 그려내고 있다. 독자는 명화 속으로 빠져든다.      


 덥고 환한 날이다. 들판에 군데군데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길을 따라 푸릇한 빛이 갑자기 일렁인다. 우리는 아빠가 포티파이브 카드 게임에서 빨간 쇼트혼 암소를 잃었던 실레일리 마을을 통과하고 그걸 딴 사람이 곧장 소를 팔아 치웠던 카뉴 시장을 지난다. 아빠는 조수석에 모자를 내던지더니 차창을 내리고 담배를 피운다. 나는 땋은 머리를 풀고 뒷좌석에 누워 뒤창을 통해서 하늘을 바라본다. 군데군데 푸른 하늘이 드러나 있고 분필을 칠한 듯한 구름이 떠 있다. 하지만 대체로는 얼기설기 지나는 전선에 긁힌 듯한 나무들과 하늘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이따금 작은 갈색 새 떼가 전속력으로 날아가며 사라진다.(10쪽)     


아주머니가 웃으며 자기 엄지를 핥더니 내 얼굴에 묻은 무언가를 닦아준다. 엄마의 엄지보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뭔지 모를 것을 말끔하게 닦아내는 느낌이 든다. 아주머니가 내 옷을 보자 나도 아주머니의 눈을 통해서 내 얇은 면 원피스와 먼지투성이 샌들을 본다. 우리 둘 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흐른다. 묘하게 무르익은 산들바람이 마당을 가로지른다.(14쪽)     


젖소들이 뿌리만 남기고 풀을 뜯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계속 걸어가고, 양동이의 가장자리를 타넘는 바람이 가끔 속삭인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28쪽)     


 수채화를 그리듯이 전개되는 문장은 묘사로만 그치지 않는다. 젖소들의 풍경으로 들판과 집의 평화로움을 대신 전달하고, 양동이 가장자리를 타넘으며 속삭이는 바람으로 이곳 사람들이 다정함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말없이 걷는 소녀와 아주머니가 행복한 모습이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후에 전개될 ‘그렇지 않은 침묵’을 미리 넌지시 알려준다. 그러니 작가는 이 짧은 하나의 장면으로 풍경과 분위기와 관계와 암시까지 모두 담았다.     

 

읽는 이를 매혹시키는 장치는 또 있다. 한없이 깊은 곳까지 끌고 들어가는 몰입에는 현재형 문장도 한몫한다. 바로 눈앞에서 모든 장면이 펼쳐지는 듯하다.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과거형 문장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다르다. 현재가 생생하다.      


 “들어가자, 아가.”     


아주머니가 나를 안으로 이끈다. 복도를 들어가자 잠시 깜깜해진다. 내가 머뭇거리자 아주머니도 같이 머뭇거린다. 후끈거리는 부엌으로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나에게 앉으라고, 내 집처럼 편하게 있으라고 말한다. 빵을 굽는 냄새 외에도 소독약 냄새와 표백제 냄새가 살짝 난다. ... 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들어오지만 부엌은 뜨겁고 고요하고 깨끗하다. 길쭉한 물잔에 꽂힌 길쭉한 프랑스국화는 물잔만큼이나 고요하다. 어디에도 아이의 흔적은 없다.(14쪽)   

  

 문장의 완급도 매력적이다. 긴 문장과 짧은 문장을 적절하게 교차 배치하여 독자는 즐겁게 가락을 타며 읽는다. 줄글이지만 가락글에서 느끼는 재미를  맛본다. 물론 호흡도 편하다.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차라리 빨리 가고 싶다. 얼른 끝내고 싶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축축한 밭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들, 언덕들을 내다본다. 처음 왔을 때보다 더 푸르러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침대에 오줌을 싸고 뭔가 깨뜨릴까 봐 걱정했던 그때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81쪽)   

  

 이 소설은 인물의 성격을 설명하지 않는다. 말과 행동을 묘사함으로써 그 인물이 어떤 성격인지 독자가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든다. 그러니 보여주기로 직접 알아차리도록 한다. 해석은 독자에게 맡긴다.   

   

 아빠가 아주머니에게서 루바브를 받지만 아기라도 안은 것처럼 어색하다. 라바브 한 줄기가 툭 떨어지더니 또 한 줄기가 덜어진다. 아빠는 아주머니가 루바브를 주워 건네주기를 기다린다. 아주머니는 아빠가 줍기를 기다린다. 둘 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결국 허리를 숙여 루바브를 줍는 사람은 킨셀라 아저씨다. (20쪽)     


 아빠는 투박하고 불친절하다. 루바브를 받다가 바닥에 떨어져도 주울 생각도 않는다. 목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기다린다. 결국 그 역할은 다른 사람 몫이 된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예의가 없다. 그 사람됨을 미리 알고 꼿꼿이 기다리는 아주머니와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이런 정황을 눈치챈 킨셀라 아저씨. 불편한 사태를 수습한다. 이들 사이 불편한 관계와 인물 성격까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서정적인 문체가 대부분인 이 소설은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장치도 잊지 않는다.   

   

 나는 아홉 시 뉴스에서 죽은 단식 투쟁가의 어머니, 폭동, 아일랜드 수상, 아프리카의 외국인들, 기아, 마지막으로 일기예보가 흘러나오는 동안 위타빅스를 총 다섯 개 먹는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앞으로 일주일 정도 날씨가 또 맑을 거라고 한다. 아주머니는 뉴스를 보는 내내 나를 무릎에 앉히고 내 맨발을 느긋하게 어루만진다.(43쪽) 

     

 중요하지 않은 사회적 배경이나 정치적 요소는 짧고 간단히 어휘 몇 개를 나열하며 언급할 뿐이다. 그렇다고 시대 배경을 생략하여 암흑 속 이야기를 하는 어리석은 서술기법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3) 가장 좋은 부분과 그 이유


 무엇보다 눈에 띄는 장치는 마지막 부분이다. 절정에서 감격을 터트리지 않고 결말, 그러니까 절정을 결말로 마무리 짓는다. 여운을 길게 끌고 간다. 열린 결말로 매듭지으면서 뒷이야기는 독자 상상에 맡긴다. 독자가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이끄는 방법이다.      


마지막 대화문도 인상적이다. 열린 결말에 마지막 장면과 마지막 대화도 독자를 긴장시킨다.    

  

“아빠”     


달려오는 아빠를 보고 ‘아빠’라고 ‘그에게 경고한다’고 서술한다. 이 ‘경고’라는 번역이 적절한지 한참 생각했다.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너무 직설적이어서 오류를 범한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두 번째 ‘아빠’를 이해하고 나서는 모두 해결된다. 두 번째 '아빠'는 친척 아저씨한테 소곤대는 다정한 부름말이었다. 진짜 아빠처럼 돌보아준 그 마음에 대한 답례였다. 그리고 ‘아빠’라고 부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담긴 호칭이었다. 그러면 거칠고 무관심한 친아빠가 달려오고 있음에 ‘아빠’라고 긴장하며 ‘경고’한 표현이 충분히 이해된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맡겨진 소녀’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여자 아이가 여름 방학 동안 겪는 내용이다. 위로는 언니가 둘이나 있고 남동생도 있다. 다자녀에다가 빈곤한 살림에 엄마는 또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다. 늘 말이 없고 겉도는 셋째딸인 소녀는 외가 친척 집에 맡겨진다. 따뜻한 보살핌 없이 자랐다. 읽기도 서툴고 ‘네’라는 발음마저도 부정확한 아이다. 친척 집 아저씨(이모부)와 아주머니(이모)는 다정하게 말하고 정성으로 챙기며 돌본다. 요리를 거들거나, 매일 달리기를 하고, 새 옷을 사거나, 밤바다 산책을 하는 등. 함께 살며 친절한 돌봄과 충분히 사랑을 받는 소녀가 된다. 그런 여름 방학이었다.     

 

독자는 달리기라는 소재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읽는 중에는 그렇다.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즈음 그것은 말끔히 해소된다. 이모부한테로 달려가는 마지막 장면을 위한 장치였다. 더 빨리, 더 힘차게 달려가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아저씨 품에 안긴 채 친아빠가 오고 있음을 경고하고, 다정하고 친절하게 돌보아준 아저씨 품에서 “아빠”라고 나지막이 부른다.    

  

작가는 독자를 유년 시절로 데려가 ‘맡겨진 소녀’를 경험하게 한다. 서운했던 어린 시절, 아팠던 유년, 상실된 소녀, 다사로웠던 그 시절. 독자는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추억하겠지만 아련히 그리운 소녀 시절을 거닐게 하는 소설이다.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 속 '맡겨진 소녀'가 되는 시간이다.    

  

이모 부부의 아들 잃는 결핍 요소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읽었다. 단지 소녀가 친절한 보살핌을 받았던 여름 방학 동안의 추억쯤으로 읽고 뛰어난 묘사력과 이모 부부의 다정함과 친절함을 읽는 얇은 감동만 첫 번째 읽기의 수확이었다. 하지만 다시 읽으니 달랐다. 거기에다 이모 부부가 자식을 잃고 무척 힘든 상황을 상기했다. 더불어 어린 조카를 한 달 동안 돌보고 정을 붙인 상태에서 이별하는 장면으로 읽었더니 그 감동은 가슴저리게 증폭되었다. 소녀가 어떤 남자도 잡지 못할 정도로 순록처럼 빨리 달려가 이모부한테 안길 때 차 안에서는 또 다시 상실하는 아픔을 울음으로 터뜨리는 이모가 있다. 이모 부부의 그 아픔을 간과하면서 키건이 말하는 깊은 울림을 놓칠 뻔했다. 

       




4 소녀의 친 부모와는 다른 킨셀라 부부의 특성을 서술해 보자, 


친부모는 소녀에게 무관심하다. 학교에 다녀온 소녀를 엄마는 부엌에서 돌아서지도 않고 퉁명하게 말한다. 대화가 거의 없다. 아빠는 투박하고 불친절하다. 가족과 가정은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돈다. 게다가 경마 투기와 카드 도박까지 한다. 그러다가 암소를 잃기도 했다. 킨셀라 부부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무례하다. 본인도 아는지 모르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다. 그러니까 무식한지, 무례한지 아니면 둘 다인지 헷갈릴 정도다. 


반면, 킨셀라 부부는 친절하고 다정하다.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맞이하고 인사를 건넨다. 집안일을 적절하게 거들게 하면서 대화하고 챙긴다. 소녀에게 분명하게 대답하는 법과 글읽기를 가르치고 이모부는 달리기를 매일 연습시키며 순록처럼 빨리 달리라고 격려한다. 죽은 아이 문제로 충격을 받았을 소녀를 위해 이모부는 바닷가 산책을 소녀랑 같이 다녀오고 미사에 참석하려면 예쁜 옷이 있어야 한다며 먼저 챙긴다. 용돈도 챙겨주는 자상한 이모부다. 


결국, 소녀는 친아빠를 부르며 경계하며 경고하고, 친절했던 이모부를 ‘아빠’라 부르며 안는다.      





5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는가? 소개해보자. 


음... 대체로 집이 온화한 분위기였지만, 옆집 할머니는 더없이 나를 챙겼다. 어느 생일에는 물앵두나무를 생일 선물이라며 독차지하게 했다. 그 집 자녀들도 근접하지 못하게 하고 나한테만 베풀어주던 옆집 할머니 사랑이 떠오른다. 


엄마가 바쁠 때는 작은 집 고모가 불러다가 재래식 부엌 아궁이에 젓가락을 데워서 파마머리를 만들어주던 기억도 엄마와는 다른 친근함이었다. 또 다른 고모는 엄마 대신 방학 숙제를 하나하나 도와주고 챙겼다.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다양하게 챙기던 다양한 연령대의 고모들, 아재들과 교회 식구들과 등대섬 소풍과 다채로웠던 행사가 친절한 돌봄을 경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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