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ㄹ'을 쓰며,

by 다섯손가락

필사를 시작한 지 한 달쯤 된다. 좋은 글귀나 시, 읽었던 책에서 기억할 만한 내용을 옮겨적는 활동이다. 이런 단순 작업도 혼자서 하면 심심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에 ‘우연(우주의 인연)’들과 같이 하기로 했다. 더불어 각자 읽은 구절을 공유하며 서로의 근황도 알고 어떤 정신세계를 어디쯤에서 탐험하고 있는지 나눌 수 있어서 재미지다.


쓰기는 공책이다. 대부분 타이핑으로 글을 쓰는 요즘, 시대를 거슬러 접근하기로 했다. 각자 줄공책이나 메모장과 좋아하는 필기도구를 마련해야 한다. 쓰다만 공책도 좋지만, 귀한 문장을 쓰는 작업이므로 최고급 용지로 만든 공책이다. 반질반질 매끄럽고 감촉이 부드럽다. 쓰는 도구는 연필, 샤프펜슬, 볼펜, 만년필, 붓 등 다양하지만 손아귀에 편하게 잡히면 그만이다. 그중에서도 글씨가 미끄러지듯이 깔끔하게 써지는 녀석으로 골랐다. 0.38미리 볼펜. 사각사각 흑연이 지면 위를 뭉개며 내는 소리도 좋지만 더 깔끔하기로는 얇은 볼펜이 제격이었다.


문제는 공책에 직접 써야 한다는 것이다. 컴퓨터 자판에 손가락을 올리고 아래로만 타타탁 치면 되는 작업을 이젠 긋고 내리고 돌리고 여러 각도로 손목을 움직인다. 힘을 다양한 방향으로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이런 불편함을 무릅쓰면서도 손글씨로 명문, 미문을 담으려고 지면을 꾹꾹 새긴다.


글씨는 삐뚤삐뚤 초등학생이 보면 웃고 갈 정도다. 서각하는 분들이 보면 예술이라 할는지도 모르겠다. 한 달 가까이 하다 보니 처음 시작할 때보다는 가지런해졌다. 문제는 ‘ㄹ’이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쓰려고 해도 이 ‘ㄹ’ 만큼은 예쁜 글씨체가 나오지 않는다. 처음 시작할 때는 힘을 잔뜩 넣고 세차게 내달리고 불끈 꺾는다. 그 마음 그대로 받아 옆으로 긋고 아래로 둥글게 각을 세워 감는다. 그러면 초성 ‘ㄹ’리 제법 의젓하게 자리를 잡는다.


무엇이든지 처음 시작하는 마음은 그러하리라. 온몸에 힘을 가득 채우고 반듯한 자세로 임하는 다짐이 실린다. ‘ㄹ’도 초성일 때는 그렇다. 자음이니 중성은 없고 다음은 종성이다. 끝소리 자리에서는 손목에도 힘이 빠진다. 젖먹던 힘까지 모두 모아 출발했던 초성의 첫머리와는 다르다. 한 풀 힘이 빠진 시작으로 직선은 곡선으로 변하고 각지게 꺾어내리던 기역 부분은 여지없이 둥글려지고 만다. 옆으로 정직한 발걸음을 찍던 자리는 180도 돌려지는 마지막 획에 자리를 뺏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지막 궁글리는 지점에서 위로 뾰족하게 기교를 부려보지만 정자체 ‘ㄹ’의 변형에 불과하다. 어떨 땐 지지직 갈 짓자로 대신 앉히고 만다.


종성이 그렇다. 일의 말미가 힘이 없어지는 건 다반사다. 무슨 일이든 시작은 좋다. 비장한 각오로 나선 여정은 중간중간 유혹을 받으며 한번 꺾이고 두 번 꺾이기를 반복하다가 종국에는 그 초심이 흐려지고 마련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다짐했던 수많은 입다짐이 그러했다. 운동과 다이어트, 여행, 공부, 독서, 글쓰기, 책 쓰기가 말이다. 이제 삼월. 석 달이 흘렀다. 봄날 아지랑이처럼 흐물흐물 투명하게 피어오르다가 옅어지는 하순으로 접어들고 있다. 연초에 새겼던 가슴팍 ‘ㄹ’같은 글자를, 문장을 뒤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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