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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Apr 04. 2024

작가 만남 9.

한정원, <시와 산책>



한정원 작가가 왔다. 문장이 아름다운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태어나서 성장하고 일하면서 대략 열 개의 도시를 거쳤다. 그러다 보니 사람과 공간을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시와 산책』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책은 미리 읽지는 못하고 참석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진주문고로 쪼르르 달려갔다. 헐레벌떡 도착하니 그가 단아한 외모와 차분한 음성으로 환하게 맞이한다. 산책을 즐기는 그는 목소리도 차분하다. 강연 내내 시 낭송이 흐르는 듯했다.


그의 작가 인연은 우연이었다. 출판사에서 먼저 내용을 기획하고, 그다음 작가를 찾았다. ‘말들의 흐름’을 기획하고 끝말잇기처럼 목차를 먼저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4. 시와 산책’을 맡아 쓰기로 섭외한 작가가 자리를 비우면서 그가 대신 작업하게 된다. 이렇듯 우연은 필연적 운명을 만든다. 그의 작가 이력을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가로 만들어지는 우연적 행운.


우선 그는 호흡이 느리다. 요즘같이 다들 바쁘고 빠르게 사는 세상에 보기 드문 사람이다. 말도, 시선도, 발걸음도 느리고 여유롭다. 바쁘지 않다. 서두르지도 않는다. 자기의 단어로 자기 시간을 말할 수 있는 삶을 산다. 이것이 예쁜 산책 문장을 쓰는 그의 글쓰기 비법이다. 그는 고층 빌딩과 키 높은 아파트가 있는 도시 산책보다 나무가 많이 있고 조용한 곳을 천천히 걷는 것을 좋아한다. 기질이 한량이라 이것저것 다 보면서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며 즐긴다. 음악을 듣지 않고 귀를 열어둔다. 바깥의 소리, 나무의 소리,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 등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도 열어둔다. 소리는 모두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이기에 그대로 귀에 담는다.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 언 강에서 울리는 겨울의 소리, 산속 짐승 울음, 깊숙한 곳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한편, 아무나 들을 수 없는 소리이기도 하다. 한정원 작가처럼 느리고 여유로운 산책과 호흡이 그 소리를 담는 귀를 열리게 한다. 내가 지향하는 바이기도 하다. 여유롭게 자기 걸음으로 걸을 때 세상을 넉넉히 읽을 수 있다. 몽글몽글 맺힌 홍매화 망울, 머릿결을 파고드는 봄바람, 전봇대 아래 핀 민들레 한 무더기, 또닥또닥 떨어지는 빗소리, 연못 수면 위로 그려지는 빗방울의 파문, 해 질 녘 군무를 즐기는 철새 떼….


‘늙음’에 대한 글을 수월하게 쓸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다. 산책하고 와서 그날 바로바로 쓰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쓸 수 있기에 그렇다. 눈 오는 날 산책, 벚꽃 노인의 뒷모습…, 산책 후 생생한 상태에서 쓴 글은 작가 자신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덤으로 독자한테는 글 산책, 문장 산책을 즐기는 선물을 안긴다.


그가 쓰면서 항상 하는 고민은 ‘무엇을 어떻게 쓸까’이다. 그 고민이 닿는 곳은 낯선 곳, 새로운 곳이다. 『시와 산책』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외국 시를 인용했다. 익숙하지 않은 시에 접근하고 낯설게 느끼기를 바라며 썼다. 저작권 때문에 많이 인용하지는 못하고 두세 줄 정도로…. 쓸거리에 대한 고민은 비단 한정원 작가만은 아니다. 모든 글쟁이의 숙명이다. 그 고통과 힘듦을 말함으로써 우린 동지가 되었다. 같은 부류, 닮은 사람, 그의 말에 비친 나의 일부, 그리고 우리.


지난날 써놓은 일기나 기록이 없어서 이십 년 동안 머릿속에서 묵힌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여 끌어올린다고 한다. 예쁘게 쓰려고 의도하지는 않는다. 오랜 경험과 느낌을 정확하게 되살리려고 노력한다. 거기에 가깝게, 좀 더 정확하게 쓰려고 애쓴다. 긴 세월 묵힌 것을 기억 두레박으로 낑낑대며 끌어올려 복원하려고 애쓰는 모습도 나와 닮았다. 되살려낸 그 '정확'은 나의 기억이 재구성한 나의 세계이다. 창작한 새로운 세상, 나만의 시간이고 공간이다. 그것은 나의 언어로 직조한 고유한 실재 세계다.


단어를 고르는 방법은 사전 찾기와 같다고 한다. 쓰기 전에 네이버 사전을 먼저 열고 생각나는 단어나 문장을 고른다. 글의 절반 이상은 사전을 먼저 찾는다고…. 한글로 다시 풀어놓은 설명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단다. 관련된 유의어, 반의어까지 찾아보기도 한다. 그리하여 가장 적합한, 가장 정확한 하나의 단어를 고른다. 최근 내가 활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단어 찾기와 고르기는 글쟁이의 필수 해법인가 보다.


구석의 무명인. 궁금하다. 원래 수도자로 살려고 했던 마음으로 ‘구석의 무명인’, 그들을 위해 봉사를 한단다. 소외되었거나 아프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챙기고 싶었단다. 그래서인지 본능적으로 잘 다가가고 낯선 사람을 친근하고 편하게 잘 대한다. 동네 과일 아저씨, 동네 개, 길고양이 등 타인이나 동물에게까지 말 걸기나 인사를 잘한다. 역사가 기록하지 않는, 역사가 외면한 사람들. 사회가 눈길을 주지 않는, 주목받지 못하는, 바로 우리다. 그는 이토록 작고도 소박한 이에게 시선을 둔다. 그러니 그의 눈길이 따듯할 수밖에.


그는 열심히 쓰지 않는다. 써야 할 상황에서도 아주아주 안 쓰고 싶다면 안 쓴다. 에세이 제안은 많았지만, 거절한 경우가 많다. 『시와 산책』에서 내밀한 얘기를 많이 했기에 구체적인 일상을 공개하거나 공유하고 싶지 않단다. 폐쇄적이라고 말하는 그의 성격도 한몫한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경험으로 놔두는 것도 필요하고, 오랫동안 자기만 지니는 것도 필요하기에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글쓰기는 안 한다고 한다. 고유한 자기 세계를 소중히 지키고 간직하고픈 그의 마음과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많이 쓰고 빨리 쓰려는 요즘 세태와는 다른 일면이다.      


앞으로는 산문집은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작가의 말에,

예술가에게 성실성을 요구하는 시대에 독자가 애가 타게 만드는 전략이 좋다.”

라며 사회자가 농담으로 덧붙였다.

열심히 안 해도 되더라. 쓰고 싶을 때만 쓰자.”

라고 작가가 웃으며 응수했다. 이에

성실하지 않으면서 뛰어난 예술가

라며 진행자가 격찬하자 작가와 청중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는데 작가가 된 비결이 뭐냐는 질문에 뭔가 오랫동안 바라본다고 답했다. 사람, 자연, 동물, 식물을 오래 관찰기록이 쌓여서 글이 되더라고…. 그때그때 모두 적어 놓았던 건 아니지만, 이런 것들이 퇴적되어서 책으로 이어진 듯하다고 말을 이었다.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 귀담아 둘 대목이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거기에 따듯한 마음이 더해졌을 것이다. 아마도 분명히.      


여태껏 북 토크에서 만난 작가 중에 그는 나와 호흡이 가장 잘 맞는 듯했다. 그의 가치관이나, 서두르지 않고 느리게 산책하는 일상이나, ‘잘 쓰지 않았던 시간’이나!! 마지막엔 재미있고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을 소개한 시간도 유익하고 즐거웠다. 그것 또한 나와 닮았다. 앞으로도 어디선가 자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짙다. 진행 중 수시로 마주치는 시선은 영혼이 서로 맞닿는 듯했다.     


『시와 산책』 책에 얹어서 나에게 준 그의 문장.

같이 걸어요, 느티나무님.

나의 필명을 적고 불러준 첫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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