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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Apr 22. 2024

1-6. 에미야, 물 가져 오니라

새실댁은 막내며느리

새실댁은 엄마 택호다. 시집온 새 사람이 살던 본가 마을 이름을 붙여 택호를 짓는다. 엄마는 새실이 친정이므로 새실댁이 되었다. 큰어머니는 단성댁, 작은어머니는 거창댁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셋째 며느리이면서 막내며느리 새실댁이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인근 도시에 살면서 가끔 들르셨다. 작은아버지는 아들이 없고 딸만 여섯인 작은집으로 양자로 가셨다. 같은 동네에서 개울이 흐르는 골짝을 사이에 두고 목청껏 부르면 대답을 할 정도로 가까이 사셨지만 제사나 생신, 명절, 집안 행사 때에만 간간이 건너오셨다.


엄마는 스물하나에 시집와서 스물다섯에 혼자 되셨다. 이후 서른다섯까지 시어른을 모시고 시골에서 꽃다운 이십 대, 삼십 대 열다섯 해를 그렇게 사셨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역 면사무소에서 일하신 할아버지는 농사일은 못 하신다. 일꾼들 손이 없으면 논농사나 밭농사가 가당치도 않다. 몸이 약하고 천식이 있는 할머니는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 책 읽는 일이 주요 소일거리다. 기역자로 허리가 구부러진 증조할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고 집 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셨다. 그 뒷정리도 어머니 몫이다.


엄마는 늘 바쁘셨다. 평소 식구는 객식구가 더하지 않더라도 기본 열 명이었다. 어른 세 분, 엄마와 나, 일꾼 셋, 혹은 넷. 많은 식구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기는 일은 기본이고 명절이나 생신, 제사가 있으면 이십 리 길을 걸어서 장을 봐 오셨다. 미루나무가 양쪽으로 끝없이 늘어선 비포장도로를 왕복 사십 리 길을 이틀, 사흘씩 터벅터벅 걸어서 다닌 이유가 있다. 아버지가 차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로는 그 빨간 버스를 한동안 못 탔다. 생때같은 지아비를 하루아침에 데려간 그 기계가 괴물로 보여서 무섭고 치가 떨려서 못 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늘 사랑채에 계셨다. 거기서 책도 읽으시고 글도 쓰시고 업무를 보셨다. 할머니와 긴히 의논하실 때에도 할머니를 사랑으로 부르시거나 할머니가 먼저 내려가셨다. 집안 어른들끼리 의논할 일이 있어도 거기서 모두 이루어졌다. 동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셔도 사랑채까지만 다녀가셨다. 바깥손님 맞이도, 집안 손님 맞이도 사랑에서 이루어졌다. 작은집 조카나 종손자를 부르는 일도 거기서였다. 그러니까 사랑채는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남자들의 자리이고 할아버지 사무 공간이다.


손님이 오시면 할아버지는 사랑채 할아버지 방에서 부저(벨)를 누르신다. 그러면 안채에서 ‘삐이익~~’ 소리가 난다. 급할 때에는 ‘삑삑~~’ 두세 번 누르신다. 그 소리 횟수나 속도에 따라 어머니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편찮으실 때에는 밥상이 사랑으로 간다. ‘밥상 내어 가거라’ 혹은, ‘물 가져 오니라’, ‘약 가져 오니라’라는 뜻으로는 한 번의 부저 소리로 며느리를 천천히 부르셨다. 기침이 잦거나 급하게 돌봄이 필요할 때에는 삑삑~~삑~~ 소리를 다르게 하여 급하게 며느리를 부르셨다. 건강하실 때는 마루에 나오셔서 “은주 에미야~~”라고 부르셨다. 엄마가 부엌에 있어도, 방이나 마당에 있어도, 사랑에서는 할아버지가, 안채에서는 할머니 두 분이 ‘은주 에미’를 부르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잔심부름하던 계집애들이 하나씩 도회지로 나가면서 모든 자잔한 일까지 어머니가 다 해야 할 몫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현상이지만 그 시절 우리 집 구부간(舅婦間-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 소통은 그랬다. 훗날 어머니는 그 시절을 회상하며 저승 가서는 “은주 에미야~~”라고 부르는 소리가 안 들리는 곳에 묻히고 싶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그 바람이 이루어진 걸까. 엄마 원하신 대로 지금은 그 어른들 산소와는 거리를 두고 선산 안쪽 한적한 곳에 아버지와 둘이서 나란히 오붓하게 누워 계신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하셨을까 싶다. 어른 봉양으로 일이 많을 뿐만 아니라 방학이 되면 조카들도 한 달씩 지내다가 가곤 했다. 설 명절에는 친척들이 음력 보름까지 세배하러 오는 분이 끊이지 않았다. 어떨 때는 초봄에도 세배를 오기도 했으니 어른 봉양 못지 않게 손님 대접도 만만찮았다. 고된 중에도 엄마는 어린 조카들이나 집에 오는 손님을 늘 귀하고 반갑게 대하셨고 오히려 부족한 게 없는지 살피고 더 챙기고 싶어 하셨다. 그렇게 ‘내 집에 온 객’을 정성껏 최대한 융숭히 대접하고 정성을 다하는 게 엄마 자존심이었다.


'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라 하였던가. 엄마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지도 않았을텐데 그 문장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살았을까? 그건 앎이나 지식으로 행하는 실천이 아니었다. 엄마의 타고난 천성이 그랬다. 게다가 살면서 보고 배우고 호흡하듯이 익혀서 저절로 드러난 모습이었다. 그건 생각으로 의도하는 행동이 아니라 원래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신이 허락한 아름다운 천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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