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여섯 시 첫 차
음력 2월 초, 이른 봄. 그날이다. 치맛자락이 휘감기거나 바지통 사이로 봄기운을 머금은 찬바람이 솔솔 길을 만들며 비집고 흐르던, 그런 날이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화재도 잦은 계절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계절이라 바람을 올리는 풍습도 있었다.
바람 올리는 날에는 굿을 했다. 팥시루떡을 해서 집 안팎으로 곳곳에 뿌리고 굿판을 벌였다. 동네 뒷동산 아래 한두 살 많은 그 아이 집에는 행사가 많았다. 아래채 작은 방은 동네 교회가 발원되었고 수십 년을 건너 그날은 바람 올리는 굿판이 벌어졌다. 큰 시루떡을 안채 한가운데 상을 차려놓고 무당이 둥둥거리는 북소리에 맞춰 칼춤을 추었다. 바람이 들지 않도록, 화기가 집 안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기원하는 주문을 읊으며 올리는 무속이었다. 마당을 몇 바퀴 돌고 부엌, 헛간, 아궁이가 있는 여기저기, 대문 양쪽과 집 밖 담벼락 아래까지 한 바퀴를 돌고 마지막에는 무당이 떡시루 한가운데에 칼을 사정없이 내리꽂으며 악귀를 물리쳤다. 꽂았던 칼을 다시 뽑았을 때 칼날에 떡가루가 묻지 않아야 상서롭다 하였다. 찐득하게 떡이 묻어나오면 무당은 혀를 끌끌 차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그날도, 벼락같은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아직은 찬 바람이 불고 푸석푸석 먼지가 날리고 을씨년스런 기운이 동네 곳곳을 흘러 다니던 그런 날. 음력 이월 초. 굿판이 벌어지고 교회를 개척한 사랑방이 있는 그 집 아래가 작은집이다. 좁은 골목길과 탱자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작은집 양계장이 길게 학교 건물처럼 늘어진 곳이다.
작은아버지는 대도시에서 법대를 나오셨다. 할아버지는 작은아들에 거는 기대가 컸다. 처가 조카들이 법조계에 있으니 아들도 의젓한 법조인이 되리라 철석같이 믿고 기다리셨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아버지의 늑막염으로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군에서 생긴 지병을 끌어안고 허약해진 몸을 보하며 학교를 마친 후에는 시골에서 지내셨다. 상록수의 영신과 동혁처럼 닭도 키우고 돼지도 치면서 지내셨다. 그날 새벽 양계장에서 불이 났다. 전기 누전인지, 어디서 담배 불씨가 날아왔는지, 남아 있던 불씨가 살아났는지 새벽 어스름에 불이 나서 동네 사람들은 온통 불 끄기에 바빴다.
아버지는 아우다. 형님 일에는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도와야 한다. 밤새도록 불을 끄고 와서 차가운 냉골 방에 잠깐 눈을 붙였다. 한겨울도 지나고 장작 땔감을 아끼는 이른 봄. 방이 서늘하게 식은 새벽이다. 차가운 방바닥에 잠시 쉬다가 간 짧은 선잠이 아버지의 마지막 안식이었다. 잠깐 눈만 붙였을 뿐이라고, 뜨끈한 방에 몸이나 따따시 녹이고 갔으면 좋으련만... 엄마는 오랜 세월 동안 두고두고 아린 눈빛으로 그 시간을 다시 되감곤 했다.
그날 새벽은 엄마의 기억 속에 여러 얼굴로 남아 있었다. 어둑어둑한 새벽에 밥을 퍼서 부뚜막에 올려놨는데 그 밥그릇이 떼구루루 아래로 굴렀다면서. 그 밥을 드리지 말고 새 밥을 다시 떠서 밥상을 차려야 했는데... 그게 그렇게 후회스럽다고. 시간을 되돌려 그 밥을 다시 차리고 싶다고. 어떨 때는 방바닥을 치며 통곡하다가, 가끔은 눈물만 소리 없이 흘리다가, 나중에는 넋두리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말았다.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면서 둥둥 떠다니던 감정과 기억도 강바닥으로 아련히 가라앉는 듯했다.
한탄스러운 일이 그 밥그릇뿐이겠는가. 어둠과 밝음이 섞이는 어스름에는 사고가 잦기 마련이다. 새벽 여섯 시 첫차는 사고가 자주 나니까 타지 말라고 옆에서 말리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기어코 아버지는 그 차를 타고 말았다. 이십 대 젊은 혈기에 그런 소리가 귀에 잘 들리겠는가. 누가 뭐라든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맘대로 하고픈 나이다.
새벽 여섯 시 첫차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 차를 타려고 그 밥도 급히 먹고 차부로 내달렸단다. 동네 구판장 앞에서는 버스를 놓치고 대숲 밑 차부까지 달려가서 마지막 승객으로 탔다니... 타지 말았어야 할 그 차를 힘껏 달려가서 마지막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올라타는 형국이라니. 인간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한 치 앞도 헤아리지 못하고 죽음이 도사리는 그곳으로 전력 질주하며 끌려가는 눈먼 존재다. 신이 두는 장기판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가 없는 미물이다. 그게 불완전한 인간의 삶이다.
대숲 밑 차부에서 아버지를 태운 버스는 서쪽으로 돌아간다. 솔개를 지나고 구불구불 신작로를 다시 왼쪽으로 꺾어서 연화동으로 내려간다. 버스에 따라다니는 차장이 앞뒤 문에 두 명이다. 차장이 문을 못 닫을 정도로 승객을 가득 태운 새벽 버스. 경사가 급한 시골 자갈길이다. 위에서 급하게 내리달리며 오른쪽으로 급회전하다가 시골 버스는 무게중심을 잃고 뒤집히고 말았다. 넓은 시내가 흐르는 다리 위에서 아래로 굴러떨어진 참사다. 맨 뒷자리에 있던 아버지와 뒷문 차장만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운전사도, 다른 승객들도, 동네 친구나 형들도 조금씩 혹은 많이 다쳤지만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와, 당신들만 돌아왔십니까. 우리 은주 애비도 같이 와야지요. 같이 데리고 왔어야지요.”
라고 목놓아 울며 무너지던 울음소리가 전설처럼 그날의 시간 속에서 다시 울린다.
그건 살아 돌아온 이들을 원망하는 말은 아니었다. 무참히 돌아온 지아비를 맞이한 어린 지어미의 무력한 한탄이었다. ‘따신 밥 잘 먹고 멀쩡하게 걸어서 나간 사람이 한 시각도 지나지 않아서 그런 꼴로 돌아왔으니’ 어느 누가 제정신이겠는가. 어느 누구라도 붙잡고 그 이유를 묻고 원망 가득한 마음을 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면 돌아온 아재들은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서럽도록 같이 목이 메게 울었을 것이다.
왜 신은 장기판에서 그 데려가는 말로 우리 아버지를 택했을까. 다른 말도 있는데 왜 우리 아버지, 나의 아버지여야 했는지 따져 묻고 싶다. 세 살배기 어린 딸이 있고 꽃같이 젊고 어린 각시가 있는 하필이면, 그런 어리고 젊은 사내를 골랐는지.
아버지는 군대 복무를 면제받았다. 서류에는 ‘병종’이었다. 일설로는 할아버지가 면에서 일하실 때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아버지가 몸이 약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그 당시는 거의 모든 신체 건강한 남자들이 군인 복무를 하던 시절이다. 남자들 모이는 자리에서 군대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 필수 화제다. 그 못가 본 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다들 다녀온 그 군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 대신 예비군 훈련하러 가다가 그 꼴을 당했다.
M1 소총, 총기 수리. 큰 배가 드나드는 항구가 있는 노량에서 배를 타고 남해나 통영으로 가서 그 훈련을 받았다. 아직 남해대교가 생기기 전이라 배로 이동하던 시절이다. 동네에서 한 왼쪽으로 모퉁이를 돌면 연화동이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노량이다. 아버지는 그토록 갈망하던 군대 경험담을 끝내 나누지 못하고 말았다. 그 발걸음은 연화동이 끝이었다.
아버지 이름은 둘이다. 집에서 부르던 이름은 ‘수길’이다. 왜 그런 이름을 지었을까? 아마도 목숨 ‘수(壽)’에 길할 ‘길(吉)’일 것이다. 목숨이 길하라고, 좋아라고, 길으라고, 오래 살라고 지은 이름일 것인데 그 이름값도 못 하고 말았다. 이 땅에서 누린 삶은 이십오 년 육 개월 남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