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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섯손가락 Apr 20. 2024

1-3. 살짝 흘린 미소가 결혼이 될 줄이야

결혼기념일은 크리스마스이브

크리스마스이브. 양력이 아니라 음력 12월 24일. 엄마가 아버지와 결혼한 날이다. 설날 일주일 전이니까 이날이 맞다. 엄마는 그날이 결혼기념일이라 했다. 음력은 빼고 크리스마스이브를 결혼기념일로 하고 싶다 하셨다. 간단히 외식하거나 케이크나 선물을 드리며 조촐하게 우리만의 축하를 했다. 그것도 자주 못 했다. 두세 번 하다가 말았으니 영영 하지 못한 서운함만 끈 셈이다.


결혼식을 한 장소는 새실이다. 전통혼례로 진행하고 기념사진 촬영을 했나 보다. 사진 속에는 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가 신랑인 아버지 옆에 계시고, 뒤로는 한재서 우인들이 왔다. 봉환이 아재, 언양 아재, 한철이 오빠다. 그때 환갑 전이었던 할아버지는 넓고 흰 동정을 환하게 두른 검정 두루마기를 입으셨고 작은할아버지는 엄동설한 겨울인데도 흰색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흑백사진이라 그렇다.


엄마 옆으로는 외할아버지가 훤칠한 키로 우뚝 서셨다. 그 옆엔 키가 작은 부산 할아버지, 그리고 월운 한재 할아버지다. 모두 흰색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뒷줄에는 큰외삼촌과 이모부 두 분이다. 뒷줄에는 대부분 양복이나 점퍼를, 큰외삼촌은 흰 두루마기 차림이다. 뒤로는 열 폭 병풍을 둘렀고 마당에는 멍석을 깔았다. 그때만 해도 육십 년대 중반, 그러니까 1965년인데도 얼마나 남성 중심의 사회였는지 이 사진이 보여준다. 결혼식 기념사진 촬영에 여자는 신부 한 명뿐이다.


그 한가운데 아버지와 엄마가 신랑, 신부로 섰다. 아버지는 비단 두루마기인지 광택이 나고 두툼해 보인다. 검정 양복과 검은색 구두에 두루마기 차림이다. 엄마는 한복에 면사포를 얹었다. 추운 겨울이라 속옷을 많이 입었나 보다. 품이 불룩하고 통통하다. 한복은 광택이 나고 꽃무늬가 군데군데 있는 공단이다. 자주색이었다. 남보라색 빌로드 한복과 같이 옷장에 걸려 있던 그 옷이다. 오래된 흑백사진이라 흐릿하지만 기억 속 엄마 옷장 풍경은 그렇다.


머리 위에는 족두리 대신 화관을 썼다. 얇고 긴 면사포가 어깨를 덮고 바닥 멍석에까지 내려와 신랑 앞을 지나 할아버지 발치까지 늘어졌다. 신랑, 신부는 모두 흰 장갑을 꼈다. 엄마는 엉덩이를 뒤로 살짝 빼고 어깨를 움츠리며 한껏 키를 낮췄다. 신랑이 키가 작다는 얘기를 중매쟁이를 통해 미리 듣고는 최대한 신랑을 배려한 자세다.


엄마와 아버지는 그날 혼례식장에서 처음 만났다. 중매쟁이는 한재 사는 동네 아지매였다. 내 친구 할머니다. 그때는 중년의 아주머니였겠지만.


“이 댁에 좋은 처자가 있다 해서 왔심니더.”


라며 외갓집 대문을 들어섰다고 한다. 외할머니와 한참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시어른은 면에서 일하셨고 손위 시숙 둘과 동서들은 모두 대학을 나왔다는 둥, 진양 정가 집성촌인 한재라는 큰 동네에서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사는 집이라는 둥, 동네 집안에는 열두 대문집이 있으며 학교도 세웠다는 둥, 일제강점기에는 의령 백산상회에 독립자금을 댄 집안이라는 둥... 중매쟁이 긴 사설에 허풍이 더해져 우리 외할머니를 얼마나 홀려놨을지 안 봐도 뻔하다. 정작 결혼할 당사자의 말은 듣지도 않고 어른들만 정보를 나누고 혼인 결정을 한 것이다.


게다가 중매쟁이가 나가면서 대문간에서 인사할 때 결혼할 처자가 살짝 미소를 흘린 것이 결혼 승낙으로 판단되어 엄마의 결혼이 진행되었다고 하니 그 시절을 읽을 만하다. 삶은 이렇듯 순간의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생을 엮는다. 아주 작은 순간의 짧은 몸짓이 모여 작은 개울을 이루고 강물로 흘러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이루는 이치다.


일면식도 없는 신랑, 신부는 어른들 뜻에 따라 혼례식장에서 처음 만나 부부가 되었다. 그날 신부집에서 먼저 혼례를 하고 초야를 지내고 다음날이나 며칠 묵었다가 시집으로 간다. 전통혼례에서는 신랑이 혼례일에 신방을 지내고 홀로 집에 갔다가 재행 걸음하여 신부를 데려간다. 며칠 묵고 가거나 한두 달, 한두 해를 지내고 신행을 가기도 했다. 신부는 친정에서 출산과 산후 몸조리를 하고 잔손이 덜 갈 때까지 키운 후 아이를 안고 시가로 가는 관습이었다. 그러니까 그 옛날의 신행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어미를 최대한 배려하는 풍습이었다. 엄마가 시집갈 시대만 해도 이런 문화도 옅어지고 세밑이라 혼례를 올린 바로 뒷날 신행을 감행한 것이다.


며칠이 있으면 또 한 해를 보내고 나이가 한 살 많아지니 혼례도 빨리 치렀다. 엄마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고 며칠만 지나면 스물두 살이 되니 그 당시로는 많은 나이였다고 하니 우리 때로 치면 서른한 살쯤이나 될까 싶다. 또 세밑이라 설 준비로 바쁠 때라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고 신행도 급히 진행했을 터이다. 신붓집에 며칠 묵었다가 가야 하는데 바로 뒷날 시집으로 갔으니 엄마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싶다. 엄마는 이를 두고두고 서운하다고 했다.


신행은 삼십 리 길이다. 일부는 가마를 타고 일부는 택시를 탔다. 새실에서 구영실까지는 가마를 타고 구영실부터 한재까지는 택시가 신랑 신부를 태웠을 것이다. 비포장 신작로를 흙먼지 폴폴 꽁무니에 달고 덜컹덜컹 삼십 리를 달리면 동네 어귀 떡곡 고개부터는 한재다. 약국이 있는 창몰을 지나고 향나무 가로수가 양쪽으로 늘어선 학교 앞을 지나고 이 층 짜리 건물인 농협 구판장을 돌아서 교회 앞으로 오른다. 기왓담이 늘어진 뒷터를 거쳐 앞터 앞마당까지는 택시로 갔을 것이다.


이후 집까지는 가마를 타고 집까지 올라야 한다. 손윗동서들이 그렇게 하였으니 엄마도 그래야 한다. 하지만 그새 십여 년 세월이 훌쩍 흐르고 변하여서 그랬는지 엄마는 걸어서 시댁까지 올랐다. 앞터 앞마당에서 내려서 작은집 두 집을 지나고 굽이굽이 골목길을 올라 맨 위에 있는 한재 우리 집에 도착한다. 설을 앞둔 며칠 전이었다.


엄마는 산골에서 자라 옛 풍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다. 가마도 없이 새 며느리를 여러 사람 구경거리 시켰다면서 걸어서 시집에 오른 신행을 엄마는 두고두고 서운해하셨다. 살짝 흘린 미소가 혼인 승낙이 되고, 가마 없이 맨몸으로 오른 신행길. 섭섭한 마음으로 시작한 우리 엄마 새실댁 시집살이는 설날을 일주일 앞둔 엄동설한에 시작되었다. 음력 크리스마스. 엄마가 결혼기념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한 이유도 어쩌면 그 고된 시절을 잊고 축복받고 싶은 마음이지 크지 않았을까 싶다. 성탄 전야처럼  세상이 떠들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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