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섯손가락 Apr 19. 2024

1-2. 십 남매의 금자, 나의 엄마 종임

나의 엄마, 금자 씨

금자 씨는 우리 엄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의 엄마다. 우리 엄마한테는 내가 하나뿐인 딸이니까 ‘나의 엄마’가 맞다. 이런 나의 엄마는 이름이 둘이다. 그 둘 중의 하나는 ‘금자’다. ‘45년 광복동이인 엄마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시모노세키인가 어디에서 연락선을 타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음력 이월에 태어나서 8.15 광복 즈음에 외할머니 품에 안겨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났으니 일본 여자 이름에 흔히 쓰는 ‘자’가 들어간 이름이 어색하지 않다. 그 시절 여자아이들 이름이 미자, 숙자. 금자, 순자... 이렇지 않던가.


엄마 두 번째 이름은 ‘종임’이다. 시골 면서기가 호적에 있는 사촌 여동생 이름을 엄마가 시집올 때 잘못 떼어서 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머니의 시집인 우리 진주 정가 호적에는 ‘이종임’으로 실려 있다. 그러니 엄마 이름은 늘 ‘이종임’이고 학교 서류에도 언제나 엄마 성함은 그렇게 썼다.


엄마는 ‘금자’보다는 ‘종임’이라는 이름을 더 마음에 들어 하셨다. 외갓집에 가면 큰이모부가 술을 한 잔 거나하게 드시고 “금자야~~~”라며 동네가 떠나갈 듯이 부르곤 하셨다. 그러면 엄마는 “출가한 처제 이름은 와 그리 크게 부르고 그러요!”라며 대꾸를 하곤 했다. 엄마가 ‘종임’이라는 이름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금자’가 촌스러운 이름이기도 하지만 ‘종임’이라는 사촌 여동생이 부산에서 부자로 잘사는 데다가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이었다. 그래서 ‘종임’으로 서류에 쓰는 것을 은근히 더 좋아하셨다.


엄마 형제는 십 남매였다. 사남 육녀. 몸도 약하신 외할머니가 많이도 낳으셨다. 사람을 대할 때는 꼿꼿하고 호탕하신 분이다. 당찬 말씀에도 넉넉한 미소가 늘 함께 흘렀다. 제일 큰외삼촌은 공군 장교였다. 육이오 전쟁 때 비행기가 추락하여 전사하셨다고 했다. 그 당시 공군 장교는 귀하여서 이 참사를 두고는 주위에선 합천 이씨 집안에 별이 떨어졌다고 했단다. 인물도 좋고 집안을 일으킬 희망이었던 분을 젊은 나이에 잃었으니 그 애통함이 어땠을지... 둘째, 셋째인 큰이모, 작은이모는 결혼하여 일찍 돌아가셨다. 큰이모를 대신하여 새로 시집온 움이모는 외갓집 개울 건너편 집에 한동안 살기도 했다.


그 다음은 내가 또렷이 기억하는 큰외삼촌이다. 부산에서 한량이었다고 한다. 시골에 오시면 동네 친구들을 불러 막걸리를 즐겨 드시곤 하던 모습이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그 ‘한량’처럼 보였다. 큰이모, 작은이모도 부산에 살았다. 명절이면 가끔 외가에 오셔서 뵙곤 했다. 그 다음이 일곱 번째 우리 엄마다. 윤자, 숙자 다음에 우리 엄마 금자다. 엄마는 이모들 사이에서도 제일 똑똑해 보였다. 엄마가 뭐라고 큰 소리로 말하면 손위 이모들은 아무말도 않고 묵묵히 따르거나 조용해진다. 학교를 중단하고 다니던 양장학원에서도 선생님 칭찬을 제일 많이 받는 수제자였다고 당신의 영특함을 수시로 내세우던 엄마다.


막내이모는 금순이다. 쌍커풀진 두 눈이 둥실하게 크고 어린 나를 빙긋이 바라보고 어루만지던 이모. 나를 너무 쓰다듬고 예뻐라 해서 슬금슬금 피해 다니기도 했던 막내 이모. 머리숱이 많아 두 갈래로 땋은 머리는 줄다리기 동앗줄만큼이나 굵었다. 검은 머리에 흰 카라 교복차림으로 큰 키를 흔들며 겅중겅중 학교 다녀오던 모습이 선하다. 어느 여름날 아침, 간질을 앓던 이모는 비 온 뒤 물이 불어난 집 앞 개울에서 세수하다가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열여덟이었다.


그 위로 여덟 번째는 서울 외삼촌이다. 우리 엄마 바로 아래 남동생. 서울 외삼촌은 육군 중령으로 제대하셨다. 월남전에 다녀오셨고 간간이 학용품과 군용 종합선물세트를 보내오셨다. 선물세트는 군부정권시절 최고로 인기 있는 선물이었다. 한재로 그 소포가 도착하면 동네에 있는 작은집 셋 집으로 하나씩 선물을 부지런히 돌리고 저녁을 기다렸다. 할아버지는 햄이나 고기 통조림을 반기셨고 할머니 두 분은 복숭아 통조림을 즐기셨다. 과자나 껌, 사탕은 내 차지다.


한재도 가끔 들르셨다. 시집살이하는 누나도 보고 사돈 어르신께 인사도 드릴 겸 하는 걸음이다. 기사를 동원한 군용 지프차가 동네로 들어오면 다들 긴장했다. 마을 곳곳에 있는 초소 경비병들은 총을 어깨에 맨 채 눈썹도 날리지 않을 정도로 부동의 자세를 취하며 경례를 부쳤다. 지프차가 쌩쌩 달리거나 부릉거리며 지날 때도, 외삼촌이 차에서 내려 철렁철렁 소리내며 걸어갈 때도, 차렷 자세로 "충성" 구령을 힘차게 부쳤다. 시골 동네에 대통령이 와도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시골살이가 심심할 때면 서울 나들이를 갈 수 있는 곳이 외삼촌댁이었다. 서너 살 무렵, 서울역에서 스타킹을 신은 아가씨들이 신기해서 달려가 그 종아리를 만져보았던 호기심 어린 기억, 오는 길과 가는 길이 다르다며 어린 나의 총기를 드러냈던 일, 태릉선수촌과 리틀엔젤스 방문... 많은 추억을 안겨주신 분이다. 외할머니가 사돈인 우리 친할머니 서울 구경을 시켜드린 것도 여덟 번째 서울 외삼촌 덕분이다.


아홉 번째는 울산 외삼촌이다. 현대자동차에 다니셨다. 어릴 때에는 형제들과는 달리 성격이 강하여 할머니와 어머니가 걱정을 많이 하셨던 기억이 있다. 어느 집이나 막내는 그런가 보다. 막내 울음소리는 저승까지 들린다고 하잖는가.


외할머니 모습은 기억이 생생하지만 외할아버지는 남아 있는 기억이 별로 없다. 어머니, 아버지 결혼식 사진에는 보이시지만 외할아버지 모습을 나는 잘 모른다. 사진 속에서는 훤칠한 키에 신부인 엄마 옆에 외삼촌들이랑 서 계신다. 외할머니는 항상 한복 차림에 허리끈을 질끈 동여매고 바지런하고 다부지셨다. 머리엔 비녀를 꽂고 소금 양치를 하시던 모습이 어제 본 듯하다. 내가 외가에 들어서면,


“어이쿠, 우리 새끼 새끼가 왔나~?”


라며 반기셨다. 어떨 때는 동네 어귀까지 나와 계시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마루에서 마당으로 뛰어 내려오며 품속으로 와락 안으셨다. 내가 잘 먹지도 않는 인절미를 십리 길 방앗간까지 걸어가서 노란 콩고물을 묻히고 만들어서 머리에 이고 오시곤 했다. 외사촌들이랑 이종사촌들한테는 큰소리를 내어도 나한테는 늘 엷은 미소로 조용조용 대하셨다. 그때에는 어린 생각에 점잖으신 우리 할아버지 영향으로 나를 귀애하신다고 여겼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 없이 혼자된 어린 나를 안쓰럽게 봐서 그렇게 대하신 듯하다. 세 살 난 어린 손녀를 눈으로 보기만 해도 눈이 머들거리고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항상 나를 보실 때는 말 없이 고요한 미소만 지어 보이셨던 것이리라.


이렇게 많은 외가 열두 식구 중에 이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분은 서울 외삼촌 한 분뿐이다. 외롭게 홀로 남으셨다.


우리 엄마 금자 씨는 여러 형제자매와 자라서 그런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면이 남달랐다. 말 한마디만 들어도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척척 알아듣고는 편하게 대하셨다. 엄마가 시원시원하게 처방과 해법까지 건네면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고 환한 얼굴로 대답하는 쪽이었다. 어릴 적 아이 생각으론, 어른이 되면 다 엄마처럼 그렇게 관대하고 사람을 훈훈하게 대하는 기술을 터득하는 줄로만 알았다. 밥만 먹고 세월만 보내면 저절로 다 그렇게 되는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게 아니었다. 오랜 인고의 세월과 많은 이들의 아픔까지 가슴으로 보듬고 품어야만 갖게 되는 귀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반세기를 살고, 엄마를 잃고 나서야 조금씩 조금씩 알게 된다.


휘영청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열 명의 형제자매 속에 자라 넉넉했던 엄마의 모습이 한층 더 그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